600년 淸風明月 영화, 충주호 푸른물에 잠겼다
600년 淸風明月 영화, 충주호 푸른물에 잠겼다
  • 중부매일
  • 승인 2013.03.03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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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담은 충청의 옛 노래 3.잃어버린 청풍

청풍은 강원도에서 발원한 남한강물이 반달같이 굽이쳐 흐르고 기름진 넓은 들녘과남쪽으로 비봉산(해발524m)이 높이 솟아 있고,강 건너에는 금수산이 아름답게 펼쳐진 산수가 빼어나게 아름다운 고장으로 예로부터 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풍류를 즐기던 곳으 로 유명했다.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을 상징하는 청풍명월(淸風明月)의 본 고장으로 청풍면(淸風面), 지금은 옛기억을 고스란히 간직 한 채 충주댐 건설로 푸른 호수속으로 잠기고 말았다.

선사시대 이래 취락을 이루어 많은 사람들이 살았던 이 곳은 강에서 흘러든 모래가루가 진흙과 섞여 토양이 좋아 농작물이 잘 자라는데 특히 뿌리줄기 작물인 감자와 무,배추, 땅콩 등이 생육에 잘 맞는 조건을 두루 가추어 콩과 작물 콩, 팥이 많이 생산 됐다.

뱃길 교통이 좋고 산물이 많으며 풍치가 아름다웠던 청풍은 선비들도 찾아와 글을 남겼는데 고려시대 문장가인 주열(朱悅)이 한벽루에 올라가 남긴 글을 음미 해 본다.



"물빛이 맑고 맑아 거울 아닌 거울이오니/산기운 자욱하여 연기 아닌 연기로다/차가운(寒) 구름 이 엉기어 한고을 되었거늘/맑은 바람 만고에 전할이 없네"

또 한사람 문인인 양숙도 청풍에 흠취하여시 한수를 남겼다. "다락밖에 어즈러히 붉은 것은 붉은 살구꽃이요/시냇가에 연하게 푸른 것은 푸른 버들이로다/한지역에 밝은 달 맑은 바람 좋은 경치/세속사람 향하여 쉽사리 전하지 마오"

청풍은 물길을 따라 서울서 소금과 생필품을 실은 범선이 올라 오고 청풍주변서 생산되는 각종 작물과 약초는 서울로 내려보내 산물 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또한 주변 충주, 제천, 단양, 영월, 원주등지의 장꾼들이 끊임없이 모여 들었고, 단양쪽에서 내려오는 뗏목이 청풍에서 하루밤을 쉬면서 주막들도 흥성하여 대단위 장터가 정기적으로 열려 항상 사람들도 붐볍다고 한다.

청풍은 조선시대 18대 현종임금의 비인 명성황후등 청풍김씨 가문에서 2명의 왕비를 배출한 곳이라서 부사(府使)가 고을을 다스려 많은 관아 건물이 있었고, 경치가 아름다운 한병루(寒碧樓)에는 서울서 내려온 선비와 경상도에서 올라온 과객들이 묵어가던 곳이다.



1897년 자료를 보면 청풍은 군(郡)으로 7개면을 관활했는데 소재인 읍내면은 239호 1천222명의 주민이 거주했고, 청풍군 전체의 인구는 1만4천570명이나 된 것으로 볼때 상당히 번성했던 것으로 기록으로 남았다.

청풍을 중심으로 1년에 441회에 이르는 배가 왕래 했으며,청풍에 상주한 배가 22척이었다.

하지만 1914년 청풍군은 행정구역 정리에 따라 제천군에 편입되어 1개면으로 전락되고 만다. 면소재지는 면사무소를 정점으로 위는 읍상리, 아래는 읍하리로 나뉘었고,충주댐 수몰 당시 읍상리에 126가구 읍하리에 135가구 총 261가구 700여명이 옛 청풍면의 마지막 주민들로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 5대 명당터로 많은 인재와 2명의 왕비를 배출했고 600여년 가까이 아름다운 고장으로 영화를 누렸던 청풍면의 본향은 충주댐 건설과 함께 물속에 잠기는 운명을 맞이 했다.

충주댐이 건설되면서 청풍면, 수산면, 단양읍의 70%가 물속에 잠겼고,댐건설공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청풍면 소재지에 있던 한벽루, 팔영루, 옛 관아 건물과 양반 가옥들이 물태리 높은 곳으로 옮겨져 '청풍문화재단지'로 조성되어 지금은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문화단지 성곽에 올라보면 비봉산밑으로 아스라이 옛 청풍면 소재지가 떠오르는데 나룻배 범선 뗏목이 오고 가던 추억은 사진속에 남아 있는 기록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김 운 기

▶다큐사진작가

▶전 충청일보 사진부장

▶충북사진작가협회

도협의회장 역임

▶충북대 평생교육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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