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변광섭 청주시문화재단 문화예술부장

중학교 2학년이었던 어느 날, 소년은 교무실 청소당번을 하던 중 국어선생님의 책상위에 있던 '시인의 집' 이라는 수필집 눈에 들어와 한참이나 서성거렸다. 시인이란 무엇이며 어떤 꿈을 꾸며 살아갈까. 시인의 집에는 어떤 이야기가 숨어있으며 무엇을 먹고 어떤 사랑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저 책 속에는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소년은 대걸레로 교무실 바닥을 닦다 말고 떨리는 가슴을 움켜쥐며 조심스레 책을 만지기 시작했다. 몇 장을 넘겼을까. 갑자기 뒤에서 "너, 거기서 뭐하니? 그 책을 왜 만지는거야!" 국어선생님은 소년의 어깨를 툭 치며 다가왔다. "저기요, 선생님이 쓰신 이 책을 보면 안되나요?" 소년에게도 이런 용기가 있었던가. 자신도 모르게 더듬거리며 내뱉은 말에 선생님은 "너 책을 좋아하는구나, 이 책 가져가거라. 그리고 니네 집이 초정리지? 매주 초정약수를 떠다주면 네가 원하는 책을 다 줄테니 한 번 해봐라"며 책을 건네주셨다.

그날 저녁 소년은 '시인의 집'을 읽기 시작해 새벽녘이 다 돼서야 마지막 페이지를 접을 수 있었다. 저 푸른 산에 꾀꼴새가 울고, 아카시아 향이 온 동네를 품으며, 소달구지는 덜커덩 덜커덩 시골풍경을 싣고 개망초 화사한 꽃송이들을 가로지르고, 온 몸을 흔들어 깨우는 바람과 비와 안개와 구릿빛 사람들의 정겨운 이야기를 숨가쁘게 읽고 나니 마당에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었다.

이를 계기로 소년은 매주 일요일이면 초정약수를 한 박스씩 담아 국어선생님 댁에 가져갔고, 선생님은 그 박스에 책을 가득 채워 주셨다.

책이 사람을 얼마나 행복하게 하는지, 책을 통해 새로운 세상과 소통하고 앙가슴 뛰는 꿈을 꾸고, 책과 함께 노는 것이 친구들과 고기잡이나 딱지치기보다 더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선생님은 교육부로 파견을 가셨고,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으며, 대학의 국문과 교수로 일하기도 했다. 그 분은 바로 수필가이자 소설가이시며 문학평론가이신 '이재인 선생님'이셨다.

소년은 키가 훌쩍 크고 자라서 대학을 가게 되었는데 국문학과를 지원했다. 대학 4년 내내 야학에서 아이들에게 국어를 가르치게 된 것도, 책을 사기 위해 새벽마다 신문배달을 하고 방학때가 되면 팝콘장사를 한 것도, 대학 졸업 후 신문사 기자라는 직업으로 첫 직장생활을 하게 된 것도, 그리고 지금의 에세이스트와 문화기획자가 되고 매년 한 권 씩 책을 펴내게 된 것도 그날의 소중했던 추억 때문이었다.

당시 선생님은 글 쓰는 시간 외에는 와당(瓦當)을 수집하고 전국의 문인들을 찾아다니며 인장(印章)을 모으는 일에 몰두하셨다. 이 중 30년간 수집한 와당은 어느 대학에 기증하셨고, 지금은 충남 예산에 문인인장박물관을 운영하고 계신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지나침은 부족함만 못하다는 뜻처럼 선생님은 당신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일지라도 더 소중한 가치로 쓰여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양보하고 배려하며 나눔의 미학을 실천하고 계셨다.

소년은 지금 지천명이 코앞이지만 당신의 맑은 정신과 끝없는 도전에 대한 모습이 아른거리고, 그때마다 마음이 반듯하게 가다듬어진다. 지난해에는 직지축제를 실행하면서 '책들의 만찬 - 내 인생의 책 한 권'이라는 시민운동을 전개했다. 또 책과 그림과 생태와 차 한잔의 여유가 있는 색다른 북카페를 준비하고 있다. 시골동네에 오달지고 예쁜 미술관을 꿈꾸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부질없는 짓들로 날을 지새우고, 세상을 어지럽히고, 세월을 허비한다. 이따금 나도 방황의 덫에 걸려 온 몸이 꽁꽁 묶여 생사를 넘나드는 아픔을 겪지만 위기의 마디마디에 선생님의 가르침이 힘이 된다.

새처럼 부지런히 날며 지저귀고, 꽃처럼 아름다움으로 벌들을 모으고, 바람처럼 구석구석을 맑은 정신으로 거듭나게 하고, 햇살처럼 화려하고 눈부신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 말이다. 지금 동구 밖에는 봄처녀가 마중 나와 있다. 시인의 노래가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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