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변광섭 청주문화산업단지 부장

어머니는 꽃다운 나이 스무살에 이웃마을 송정리에서 초정리로 꽃가마를 타고 시집 오셨다. 변가네 종갓집 맏며느리로 시부모와 다섯 명의 시동생까지 챙기시느라 뼈골 빠지게 일만 하셨다.

어머니는 시집 온 다음날부터 새벽닭이 울기 무섭게 대문을 활짝 연 뒤 솔뫼 밭으로 달려가 거름을 져 나르셨다. 뙤약볕 속에서도 허리 한 번 펴지 않고 밭을 매셨다. 여름에는 담뱃잎을 따고 엮고 말리느라 쉴 틈이 없었다. 담배 수확이 끝나기 무섭게 붉게 여문 고추를 딴 뒤 앞마당에 가득하게 펼쳐놓고 태양초의 기적을 만드셨다. 승악골로 달려가 못자리를 닦달하고 모를 심었으며, 논두렁에 콩을 심고 잡초를 뽑으며 가을걷이까지 도맡아 하셨다.

어디 이뿐이랴. 까칠한 아버지 비위 맞추기 위해 새참은 항상 홍두깨로 빚은 칼국수를 대령해야 했고, 동네 사람들을 위해 술과 간식거리 준비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꽃을 좋아하셨다. 장독대를 빙 둘러 채송화를 심었는데 여름 내내 장독대는 붉고 오종종 예쁜 꽃들의 만찬이었다. 담장 주변에는 작은 화단을 만드셨다. 냇가에서 하나 둘 가지고 온 돌로 화단을 꾸미고 꽈르르 꽈르르 터질 것 같은 붉은색 꽈리와 승려 머리를 닮은 까마종과 하늘을 향해 환한 미소를 머금은 하늘나리 등 수많은 꽃들이 춤추고 있었다.

그리고 장미와 민들레와 능소화가 바람에 꽃향기를 흩뿌리고 있었으며 여름이면 앵두나무에 붉은 열매가 쏟아질 듯 넘쳐나곤 했다. 어머니는 앵두를 따서 화채를 만들어 주셨다. 앵두와 오이와 토종꿀 등을 잘 버무려 만든 당신만의 비법이 공개되는 성스러운 순간을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겨울 한 철 잠시 쉬는가 싶지만 당신 뜻대로 되지 않았다. 종갓집을 찾는 집안 사람들과 마을 어른들이 문지방 닳듯이 오갔고 그 때마다 곶감, 고욤, 감자, 고구마, 개떡 등 먹거리를 준비해야 했다. 멀리서 온 손님을 위해서는 빈 손으로 가게 할 수 없다며 장독대 속에 숨겨 놓았던 곡식이나 가을에 다듬어 놓은 견과류를 한 보따리 챙겨 보내야 했다. 바로 그 장독대는 당신께서 매일 밤마다 정화수를 떠놓고 두 손 모아 기도하던 성스러운 곳이었다. 가족의 건강과 평안을 기원했을 터인데 이따금 장독대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소년은 어머니가 왜 장독대에서 울고 계신지, 그리고 누구를 위해 저녁마다 기도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당신의 하루일과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깊은 밤 호롱불 곁에 앉아 바느질을 하는데 언제 주무시고 언제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그 날도 어머니는 장독대에서 기도를 하셨다. 의술로도 해결할 수 없는 아픔을 어찌 천박한 미신으로 해결하려 할까 답답하기까지 했다. 아버지는 그날 운명을 달리했다. 어머니 나이 마흔여덟이 되던 그 해 여름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는 근 30년을 홀로 살아오셨다. 몇 마지기 되지 않는 농사로 자식들 대학을 보낸다는 게 어찌 가능할까 싶었다. 나는 그래서 대학을 포기하고 농사를 짓거나 공장의 노동자로 취직하려고도 했다.

그렇게 방황하고 있던 어느 날, 어머니가 뒷밭에서 수확한 과일을 팔아 공납금을 마련해 주겠다며 청주 육거리시장으로 가셨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단 한 개의 과일도 팔지 못하고 되가져 왔다.

"알이 작아 다들 안 사더라. 아들아, 애미는 이렇게 못나서 고생만 하지만, 너는 크고 튼실한 열매가 되거라."

나는 어머니의 그 한마디에 눈물을 토했다. 이를 악물고 공부를 해 대학을 가겠다는 맹서를 했다. 기자가 되고, 회사원이 되고, 작가가 되고, 예쁜 딸 세 명을 낳은 아빠가 되었다.

그런데 지금 어머니가 많이 아프시다. 허리는 고갯마루처럼 휘어졌고, 얼굴과 손등은 주름진 골이 깊어도 너무 깊다. 당뇨와 혈압에 기억력까지 쇠약해지셨다. 어머니는 평생을 자식을 위해 살아왔는데 나는 이 순간까지 나만의 욕망을 채우기 급급했으니 부끄러울 뿐이다.

오늘 나는 꽃 한 다발을 사들고 어머니 품으로 달려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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