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변광섭 청주문화산업단지 부장

18년 전 겨울, 크리스마스 이브를 하루 앞둔 그날 결혼을 했다. 신혼여행지인 제주에서 화이트크리스마스를 즐기고 돌아와 처갓집으로 인사가는데 눈길에 차가 미끄러지면서 왕복 차선을 서너바퀴 핑핑 도는 아찔한 사고가 일어났다. 신랑 신부는 천신만고 끝에 살아났고, 백년해로하라는 하늘의 뜻으로 생각했다.

그날 이후 늘 처음처럼 신새벽의 처녀성으로 살아가려고 애썼다. 첫 아이가 유산을 하고, 직장을 옮기고, 가정의 대소사를 챙기면서 일어나는 아픔과 절망과 고단한 일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때마다 첫사랑과 첫 키스의 추억과 첫날밤의 달콤함과 화이트크리스마스의 행복을 생각하면서 아픔을 이겨내려 했다. 때로는 눈길에서의 아찔한 순간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담금질하며 오달지게 살려고 애썼다.

결혼식장에서 주례를 서 주셨던 대학 은사님은 수적석천(水滴石穿)이라는 글씨를 써서 선물로 주셨는데, 우리 집 가훈이자 유일하게 거실 벽에 걸려있는 서예작품이기도 하다. 부드러운 물방울이 단단한 돌을 뚫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인내와 사랑과 노력과 지혜와 배려가 전제되지 않고 그 무엇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가슴으로 새긴다.

그런데 세상사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다. 세상에 쉬운 사랑은 없다. 아픔을 겪지 않고 피어나는 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쉬운 사랑만을 쫓고, 아픔없이 피어나는 꽃들을 열망하는 속물이 됐다. 저잣거리의 고단한 삶에 취해 방황도 하며, 쓸데없는 욕망의 덫에 걸려 아픔을 겪는 것이 어디 한 두 번이던가. 부유함과 세속적인 야망과 육체적인 욕망에 빠지기도 한다. 괜한 생각과 판단과 행동으로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고 가정과 이웃에게 아픔을 주기도 한다. 그 때마다 무모하고 부질없는 자신을 책망하는데, 이 모든 것들은 돌아서서 보면 부끄럽고 가소로워 슬픔이 밀려오기도 한다. 꽃이 피고 닭이 울고 있는데 나는 세상을 마주보지 못하니 말이다.

아내에 대한 사랑은 또 어떠한가. 아내는 언제나 나를 기다리고, 나를 위해 울고, 나를 향해 춤추고 노래하며, 나만의 건강과 행복을 기도하고 있는데 나는 늘 멀리 있었다. 우리가족의 꽃밭을 만들고, 그 꽃밭에 꽃들이 무성하게 피고 나비와 벌들의 낙원을 위해 북풍한설을 지키고 봄볕 비추는 아픔을 마다하지 않았는데 나는 언제나 여기저기 배회하며 비틀거리는 속물이었다. 회사와 세상의 불만을 집안에서 토해내는 못된 버릇이 생겼다. 가정은 나의 유일한 삶의 휴식처라며 임금처럼 군림하려 했을 뿐이었다. 아내가 무엇을 소망하는지, 아픈 곳이 어디인지, 어떤 화장품을 사용하고 있으며 머리스타일은 어떠한지 생각하면 막막하다. 아내와 단 둘이 영화관을 가고, 공연을 보고, 여행을 한 것이 언제였는지 아득할 뿐이다. 세 명의 딸을 낳고, 학교와 학원을 보내며, 가정의 일과 세상의 일을 하고, 끝없이 쏟아지는 시댁의 일을 온 몸으로 담아내는데도 나는 내 일만이 최고라며, 내 생각만이 우선이라며 핏대를 세우지 않았던가.

사람들은 말한다. 부부는 사랑으로 시작해 의무감으로 가정을 지켜내고, 정으로 꽃을 피운 뒤 열매를 맺으며, 인생의 거품이 다 빠지면 불렀던 옛 노래를 또 한 번 나직이 부르며 저무는 길을 걷는 것이라고…. 그리하여 부부란 붉은 황톳길을 달리는 것처럼 성난 빗물도 만나고 웅덩이 앞에서는 헛돌기도 하며 추위와 어둠과 비바람의 살기를 이겨내야만 한다. 수시로 마음을 씻고 닦고 비워내야만 유리알 같은 맑고 투명한 행복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나만의 일과 나만의 욕망과 나만의 아집에 젖어 있다. 오직 내가 만든 생각의 틀 안에 들어오라고 강요만 할 뿐이다. 아내는 헛헛한 마음을 달랠 길 없어 그 뒤태가 쓸쓸할 뿐인데도 말이다. 아내의 작고 여린 숨결들이 모여 내 가슴에 꽃이 피는 것인데, 그렇게 피어나지 않으면 꽃이 아니고, 춤을 추지 않으면 나비가 아니며, 노래하지 않으면 새가 아닌 것처럼 아내가 아니면 내가 아닌 것인데 그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것이다.

만화방창(萬化方暢) 오월이 저물고 있다. 자식된 도리와 부모의 몫을 다 하지 못해 울고, 살갑지 못한 남편의 욕망에 가슴 시리고 아픔이 밀려온다. 더 늦기 전에 내 마음의 숲을 가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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