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담은 충청의 옛 노래] 11. 금광석 빻던 물레방아
1982년 봄 살구꽃이 피던날 황학산에 올랐다가 영동군 상촌면 가정골로 하산하던 길에 신기한 것을 발견했다.
생전 처음보는 큰 물레방아가 쿵덕쿵 쿵덕쿵 방아를 찧는데 10개의 공이가 순서대로 쇠절구를 찧고 있었다. 하도 신기해서 다가가 보니 밑에는 쇠로 만든 바닥에 금강석을 넣고 10개의 쇠공이가 순서대로 내려치면 뽀얀 돌가루가 물에 씻겨 흘러가고 밑으로 금알갱이가 가라앉으면 수은으로 그것을 뭉쳐 벼보자기에 넣고 짜면 금만 남아 그것을 제련하면 금괴가 된다는 것이었다.
1928년께, 가난하게 화전밭을 일구며 살던 산골짜기에 큰 이변이 생겼다. 일본인들이 찾아와 땅을 파고 돌을 캐내더니 골짜기에 생전 보지도 못한 5m가 넘는 크기의 물레방아를 줄줄이 세웠다. 광부들이 모이면서 고요하던 산골은 금을 캐는 광산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호롱불만 켜던 벽촌에 전기불이 들어오고 새로운 문물이 들어와 사람들로 붐비기시작 했다.
당시 가정골 주변에 살았다는 황해연씨(黃海淵)에 의하면 상촌면 면소재지 부터 물한리에 이르는 곳곳에 금광이 있었는데 자신도 금을 캐는 광부로 일한 경력이 있다고 했다.
한창 금이 쏟아질 때는 당나귀에 금을 싣고 영동역에서 기차에 실어 일본으로 실어 보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금광맥은 남북쪽으로 뻗어 금을 캐는 굴이 남쪽에서 북쪽을 향하거나 북쪽에서 남쪽방향으로 굴을 뚫고 금은 캤는데 상촌면의 금광중 깊은 곳은 지하 800m까지 뚫린 것도 있었다는 것.
당시 상촌면에 삼황학광산(三黃鶴鑛山)이 가장 컸고 청라금광과 하화금광 등이 있어 전국에서 수백명의 광부들이 모이면서 장터가 생기고 술집도 여러 곳에 문을 열어 인구가 늘면서 상촌초등학교와 물한초등학교가 문을 열어 300명 넘는 아이들이 학교를 다녔는데 6.25 이후 금 생산이 줄면서 2천명 넘던 상촌면 광산촌이 수백명으로 줄어들었다.
상촌면은 소백산맥이 추풍령쪽에서 서쪽으로 길게 뻗어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가 합치는 삼도봉(三道峰)밑에 자리하여 삼도봉 고개를 넘으면 무주장과 설천장이 서고 추풍령을 넘으면 김천장 또한 충북에는 황간장 영동장이 서기 때문에 장터를 오가는 장꾼들도 상촌면을 경유하여 상촌면에 작은 장터가 생겨나기도 했다는 것.
그뿐인가 일본인들도 자주 왕래하여 일본 본토의 문물이 흘러들어 상촌장은 어느 도시의 장터 보다도 상품이 다양한 것이 장꾼을 모으는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금광 취재를 하느라 여러 주민을 만났는데 물한리로 오르던 길에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김기선 할머니를 만났다. 그는 15세때 벽촌으로 시집와서 5남매를 낳아 키웠는데 일본에 끌려가는 처녀공출(處女共出)에 딸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15세 어린딸을 벽지의 총각에게 억지로 시집을 보냈다는 가슴아픈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또 감 자랑으로 이어졌다.
"우리 고장에는 감나무가 많지요, 한겨울 삶은 감자로 끼니를 이어가던 겨울밤에 시아버님이 조용히 불러 홍시 3개를 주시며 1개는 신랑을 주고 2개를 새며느리 먹으라 하시는데 눈물이 났어요."
할머니는 그 고마움 때문에 집안에서 반대하는 시아버지 3년상을 치르고 나서야 마음이 놓이더라고 했다. 상촌면은 어디를 가나 감나무가 많고 감이 달아서 곶감을 난들기도 한다.
40년대 초반까지 금강석을 빻는 무쇠집이 있었는데 2차대전이 격화되면서 무기를 만든다며 시설을 철거하고 또다시 큰 물레방아를 설치했는데 많을 때는 가정골에 40곳에 물레방아가 있었다고 한다. 82년 하나남은 금방아를 처음 보고 황간까지는 기차를 타고 황간서 택시를 타고 사진에 담아온 기억이 생생한데 마지막 남아있던 그 방아는 1983년 장마에 없어지고 말았다.
김운기
▶다큐사진작가
▶전 충청일보 사진부장
▶충북사진작가협회 도협의회장 역임
▶충북대 평생교육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