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봉 자유여행가의 남미여행기 10 쿠바 (끝)

# 보고, 느끼고 싶다! 체게바라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우리의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사르트르가 이 시대의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고 했던 체게바라를 만나고 싶었다. 아니 느끼고 싶었다. 쿠바의 독립투사 호세마르띠 기념탑을 바라보는 내무성 건물벽에서, 거리의 빛바랜 벽화에서, 오래된 잡지의 표지에서가 아니라 쿠바의 삶속에서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관광객이 넘치는 아르마스 광장과 산프란시코 광장으로 가는 거리에는 짝퉁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의 음악이 흘러 나오고 혁명가 체게바라는 낡은 표지 모델로 그저 추억이 되었다. 체게바라를 흉내라도 내고 싶어서 대성당 모퉁이 가게에서 그가 썼던 별달린 배레모를 3천원 정도 주고 샀다. 머리속이 땀으로 흥건한데도 검은 모자를 쓰고 길을 다녔다. 외국관광객들은 관심밖이고 쿠바인 중에 수염기른 특이한 노인이 기념 촬영을 요청했다. 바닷가 말레꼰에서 만난 젊은 이들은 체! 체! 하며 반겼다. 그들에게 체는 친근한 친구같은 존재 같았다. 위대한 혁명가의 무게와 거리감은 없어 보였다. 체는 조국 아르헨티나에서 의사의 길을 버리고 남의 나라 쿠바의 혁명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 카스토로와 생과 사를 오가는 험난한 게릴라 전을 통해 마침내 1959면 남미 최초로 쿠바 산타클라라에서 혁명의 깃발을 꽂는다.



가자!

 새벽을 여는 뜨거운 가슴의 선지자들이여

 감춰지고 버려진 오솔길 따라

 그대가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는 인민을 해방시키려

 세상 모든 처녀림에 동요를 일으키는

 

 토지개혁, 정의, 빵, 자유를 외치는

 그대의 목소리 사방에 울려 퍼질 때

 그대 곁에서 하나된 목소리로

 우리 그곳에 있으리.

 

 압제에 항거하는 의로운 임무가 끝날 때까지

 그대 곁에서 최후의 싸움을 기다리며

 우리 그곳에 있으리.

 

 아무리 험한 불길이 우리의 여정을 가로막아도

 단지 우리에겐

 아메리카 역사의 한편으로 사라진 게릴라들의 뼈를 감싸줄

 쿠바인의 눈물로 지은 수의 한 벌뿐.



체의 목표는 남미 해방과 통일이었다. 쿠바혁명 후 국립은행 총재직을 미련없이 버리고 과테말라, 콩고, 볼리비아 혁명을 위해 다시 뛰어 들었다. 마지막으로 볼리비아 밀림속에서 게릴라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1967년 10월 9일 39살의 나이로 총살 당한다. 그는 눈 뜬채로 죽었다.

이런 체의 삶은 남미 신대륙 정복자의 길을 따라 간 여행을 통해 만들어 졌다. 우리에게 알려진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영화처럼 낡은 오토바이 한대로 선배랑 시작한 8개월 동안의 남미 5개국의 여행이 단지 여행으로 끝나지 않았다. 전사 그리스도의 삶이 된 것이다. 체는 도보와 히치하이킹, 밀항으로 힘들게 여행하면서 아름다운 경치에 넋을 놓았고 척박한 남미의 현실에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특히 칠레 추키카마 구리 광산의 노동자들의 착취 현장은 체의 삶을 송두리채 바꿔 버렸다. 안데스의 경치는 아름다웠고, 삶은 쓰라렸다. 정말로 인간은 꿈의 세계에서 내려 오는 걸까? 체가 죽은지 45년, 쿠바인들은 그를 사랑하지만 체의 심장처럼 뜨겁지는 않아 보였다.

# 쿠바를 사랑한 헤밍웨이

"그는 생각했다. 난 언제건 아바나의 불빛으로 되돌아 갈 수 있으니까. 해가 지기까지도 두 시간의 여유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아마 달과 별이 떠오를지도 모르고 그렇게도 안한다면 내일 아침 해가 뜰 때까진 올라 오리라" 산티아고 노인은 고기잡이였다. 아바나가 보이는 카리브해의 물고기가 그의 친구이자 형제였다. 깊이 내려간 다랑어 낚시밥에 걸린 물고기와 이틀 밤, 낮을 사투를 벌이면서 그는 생각한다. "인간은 패배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야. 인간은 파괴해서 죽을 순 있지만 패배할 순 없어" 노인은 의지와 희망을 잃지 않았다. 다랑어 밑밥으로 백미터 물속에서 18피트나 되는 상어를 잡았다. 그러나 노인의 낚시줄에 걸려 있는 상어를 맨처음엔 마코상어가 먹었다. 마코상어는 썩은 고기를 먹지 않는 고상한 상어다. 두번째는 돼지같은 외톨이 삽코였다. 세번째는 닥치는 대로 찌꺼기 까지 먹어 치우는 밉살스러운 갈라노 상어 두마리가 다시 먹어 치웠다. 마지막엔 떼를 지어 몰려왔다. 앙상한 뼈만 남았다. "패배하고 나면 모든 게 쉬워져. 난 이렇게 쉬운 걸 몰랐었지. 그런데 무엇이 내게 패배를 줬지." 그는 생각했다. "무엇도 아니야" 그는 소리 내어 말했다. "내가 너무 멀리 갔던 거야" 쿠바를 사랑한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의 노인은 쿠바사람이었고 이야기 속의 바다는 쿠바의 작은 어촌마을 코히마르가 그 배경이다. 나는 헤밍웨이가 라 보데기따에서 즐겨 마셨다는 '모히또' 한잔을 시켰다. 너무 멀리만 가려하는 나는 럼주와 허브향에 취했다.



# 남미여행의 종착역, 아! 쿠바

호세 마르띠 공항카페에 앉아 마지막 쿠바커피를 마시고 있다. 시내 비에하 광장에서 사탕수수로 만든 럼주를 넣은 맑고 깊은 커피 맛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아바나에서 보낸 3박4일은 여름날 쏟아진 소나기에 우산없이 흠뻑 젖어버린 기분이었다. 옷속을 타고 내리는 빗물이 어이없지만 일탈의 기분과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짜릿한 전율을 주는 그런 경험이었다. 원래 여행은 떠나야 하는 숙명이 전제된 것이라 떠날 시간이 되면 마음은 벌써 다음 여행지의 그림을 그리게 된다. 하지만 쿠바는 시간이 갈수록 가슴을 내어 주게 되는 마력이 있다. 처음 공항에서 입국심사를 받을 때 퇴짜 맞고 뭘하라는 건지 몰라 두려웠던 순간과 천둥 번개로 공항의 전등불이 꺼졌을 때의 불안감같은 것도 쿠바의 매력을 감할 수 없었다. 블로그에서 추천한 시내 민박집 카사를 찾아 헤매는 골목 길에는 땟국물 나는 검은 아이들이 놀고 있고, 페허같은 테라스에는 혁명정부의 낡은 깃발처럼 헤진 옷가지들이 펄럭였다. 국회의사당으로 썼던 까삐톨리오 건물앞 대로에는 중세시대에 어울릴 만한 마차와 내 나이 보다 더 먹은 멋진 올드 카와 자전거 택시가 섞여 다닌다. 낡은 유럽풍의 석조 건물들은 보수를 하지 않아 때묻은 대로, 깨진 대로 500년의 세월을 그대로 간직한 채 가난한 쿠바사람들의 삶의 공간이 되고 있다. 그냥, 세월의 흔적으로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사람들과 같이 살고 있는 것이다. 몇백년이 지난 성당이나 교회에서 예배를 보고 세월에 망가진 건물에서 럼주를 마시고 함께 노래 부르고 춤도 추고… 그래서 쿠바의 삶을 외롭지 않아 보였다. 물질은 부족하지만 감정과 정서가 충분했고 서로 공유하고 있었다. 쿠바의 원주민은 스페인에 반란을 일으키다 죽고 유럽인과 함께 건너 온 질병으로 거의 전멸되었다.



지금은 노예로 끌려온 아프리카 흑인들과 스페인계가 만든 혼혈이 대부분이다. 모두가 뿌리와 고향을 잃은 셈이다. 술과 노래는 자연스러운 결과인지 모른다. 흑인 특유의 리듬감과 다감한 감정은 거리 곳곳에서 튀어 나온다. 특히 동양인들에게 관심이 많다.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처음엔 무섭고 귀찮았다. 하지만 몇일 지내다 보니 그게 관심의 표현이란 걸 알았다.

시내 오비스뽀 거리를 걷다보면 이방인 정서를 느끼지 못한다. 품어나오는 따뜻한 사람냄새로 외롭거나 소외감을 주지 않는다. 진정한 혁명의 얼굴은 물질의 분배가 아니라 인간이 향유할 수 있는 감정의 분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진 것 버려도 인간애만 넉넉하다면 우린 혁명의 강을 또 넘을 수 있지 않을까?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같은 나라, 쿠바는 떠도는 영혼의 고향 같은 곳, 마음 둘 곳 없어 찾아 다니는 여행자의 종착역. 이 지구에 쿠바가 있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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