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칼럼] 오홍진 대신증권 본점 부장

가을이다. 우리나라 가을하늘과 풍경은 창조주가 아끼는 작품임에 틀림없다. 아름답다. 사람들은 그 가을 풍광에 뒤질세라 축제를 열어 즐긴다. 전국 방방곡곡이 축제의 물결이다. 인터넷 포탈사이트에는 축제를 지역별, 종류별로 찾아주는 서비스까지 등장했다. 얼마나 종류가 많으면 이런 서비스까지 제공할까. 검색해보니 10월에 전국에서 열리는 축제가 수천 가지나 된다.

이거 너무 많은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지방자치제가 탄생하고 과시하기에 가장 좋은 축제는 그 종류와 수를 급속하게 늘려 가고 있다. 때문에 비슷한 축제가 난무하고 지방자치단체 간에 서로 자기 것이 우선이라며 신경전을 벌이는 경우도 생기고 있다.

또, 서로 도와주느니 안 도와주느니 하며 옥신각신한다는 기사도 눈에 띈다. 축제의 이면에는 이를 기획하고 실행하는 공무원들의 보이지 않는 실랑이와 한 건 해보겠다는 경쟁심리가 도사리고 있다. 선출직 지방자치단체장도 임기중 공적을 위해 양보하지 못한다.

그런데 정작 참여해 즐겨야 할 시민들은 마음이 콩밭에 가있는 듯하다. 그 많은 축제를 어떻게 다 쫓아다닌단 말인가. 더군다나 지역 주민만으로 축제를 즐긴다면 무슨 경제적 효과와 새로운 전통을 만들 수 있을까. 외지인이 찾고 알아줘야 축제는 빛을 발한다. 다행히 몇몇 축제는 제법 이름이 나고 방문객도 상당하다. 그러나 몇몇이다. 나머지는 뭐란 말인가.

시행착오 없이 또 시련 없이 엄청난 일을 만들 수는 없다. 큰 일에는 기회비용도 큰 법이다. 듣자하니 선진국에도 무분별한 축제 때문에 홍역을 겪은 나라들이 있다고 한다. 명품 탄생에는 수 많은 희생물이 즐비해야 한다. 그렇다고 과도한 것이 다 용서되는 것은 아니다.

어려웠던 시절 축제라고 해야 기껏 정월 대보름날 동네 단위의 어울림이나 명절 정도의 푸짐함과 떠들썩함이 있었을 뿐이다. 이제 그런 것은 급속히 사라지고 그 자리에 기획 행사 식으로 추진되는 축제가 들어서고 있다. 당연히 전통적인 축제에 비해 지금의 축제는 뿌리와 사상이 허약하다.

원래 축제는 고난과 역경 극복 뒤의 달콤한 꿀 같은 의미에서 출발한다. 한여름의 뙤약볕을 견디고 과실을 맺기 위해 땀방울을 흘리며 보낸 세월 뒤에 추수를 감사하는 축제가 열린다. 얼마나 달콤하고 감사하고 기쁜가. 또, 그런 기쁨을 생각하며 고통의 과정이 좀 더 받아들이기 쉬웠을 지도 모른다. 고통의 깊이가 더 할수록 축제는 흥겹다.

이제 축제는 의미에서 멀어지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대신 참여자들의 즐거움을 유발하여 경제적 논리의 성과를 극대화하면 된다. 축제에도 자본의 논리와 선거의 논리가 작동한다. 자본의 논리가 개입되면 성공해야 의미도 생긴다. 성공하지 못하면 의미나 전통은 사그러진다. 또, 선거에 따라 축제는 위상을 달리한다. 잘못하면 가차 없이 사라진다. 과거는 쉽게 부정된다.

축제는 즐겁지만, 미래를 위해 변화가 필요하다. 우선, 지방자치단체는 냉정해 질 필요가 있다. 축제 가짓수나 명분에 연연해 하지 말고 안 되는 축제는 과감히 없애고 가능성 있는 축제에 집중하여 보다 더 알차게 만들어야 한다. 또, 단기 성과보다는 먼 미래를 내다봐야 한다. 당장에 체면치레보다는 역사에 기록되는 걸작을 만들어야 한다. 쉽게 이루기 어려운 목표다.

시민들도 차분해질 필요가 있다. 축제는 결국 시민들의 세금이 투입된다. 잘못되면 지방자치단체의 재정을 허약하게 만들고 축제는 애물단지로 전락한다. 또한 가능성 있는 축제에는 적극 참여해 가꾸어야 한다. 시민의 자발적인 참여는 축제 성공의 요체이다. 먼저 지역에서 참여가 높고 활성화되면 다른 지역으로 파급 효과도 크다. 지역의 명품은 그 지역민이 만든다. 결국 지속적으로 선택 받은 축제만이 살아남아 역사를 쓴다. 새로운 역사를 기대하는 마음과 '적절'을 얘기하는 두 마음이 교차하고 있다. 두 개 다 바란다면 욕심일까?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