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변광섭 청주시문화재단 문화예술부장

짐을 꾸렸다. 짐이라고 하지만 세면도구와 양말 두 켤레가 고작이었다. 오랫동안 벼르던 길을 나선 것이다. 부산의 달동네 감천마을, 지리산 둘레길, 남원의 춘향테마파크, 전주 한옥마을, 그리고 대전 대흥동 골목길로 이어지는 순례길은 꼬박 2박 3일 걸렸다.

내겐 여행길의 오랜 습성이 있다. 발 닿는 곳마다 그곳의 속살을 엿보고 그 지역 사람들의 생리적인 근원까지 알고 싶어 박물관과 미술관을 둘러본 뒤 전통시장과 뒷골목 거닐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이번 여행길에서도 골목골목을 거닐고, 숲속과 계곡을 오르내렸으며, 전통시장과 민박과 특산품으로 빚은 음식을 찾아 헤맸다. 지리산 어느 마을에서는 주인 허락없이 산밭의 붉은 홍시 몇 개를 달게 비우지 않았던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가을이 붉은 치맛자락을 감아쥐고 어디론가 성급히 사라지더니, 산과 들과 아파트 정원에 도열한 나목들이 하얀 눈꽃으로 가득했다. 도시를 덮은 눈은 희고도 희어서 동화속의 설국(雪國)이 따로 없다는 생각에 젖었다. 이쯤되면 방안에서 시집을 꺼내 읽는 시간이 아깝다.

그래서 무심천을 걸었다. 야위고 야윈 나뭇가지마다 눈꽃으로 가득하고, 갈대숲에서는 바람이 어깨만 스쳐도 온 몸을 부비며 흐느낀다. 물길은 어딘가를 향해 끝없이 쏟아지고, 그 위로 잘디잘게 부서지는 햇빛과 철새들의 군무는 눈부시도록 아름답다. 다시 발길을 육거리시장으로 돌렸다. 주름지고 구릿빛으로 가득한 사람들의 표정이 깊은 슬픔처럼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골목시장에는 칼국수집과 해장국집과 만두집과 방앗간에서 김이 흰 포말을 일으키며 하늘로 올라가고, 구순한 내음은 나그네의 발목을 잡는다.

한복거리의 아름다운 옷감들과 속삭이는 청춘남녀의 풍경을 뒤로하고 중앙공원의 문을 두드리니 천 년을 살아온 은행나무 '압각수'가 반긴다. 고려 말 이색 등이 무고로 청주감옥에 갇혔을 때 성문이 떠내려갈 정도로 비가 왔고, 감옥에 갇혔던 사람들이 이 나무 위로 피해 목숨을 구했다고 하니, 임금은 하늘의 뜻이라며 이들들 석방했다고 하였던가. 신령스런 은행나무는 알고 있을 것이다. 누가 잘났고 못났으며, 누구네가 어떤 말을 어떻게 해 왔는지를. 그렇지만 은행나무는 단 한 번도 세상 사람들에게 천기누설을 한 적이 없다. 가볍게 듣고 가볍게 내뱉는 우리네와는 생각의 깊이가 다른 것이다. 100년만에 세상의 볕을 보게 된 청주읍성 북원 현장에서 서니 가슴이 먹먹하다. 그 날의 아픔, 그 날의 함성, 그 날의 몸부림이 들려오는 듯하다. 서문시장의 삼겹살거리에서 허기진 배를 채웠다. 집집마다 전해져 내려오는 비법의 간장소스와 육즙이 쏟아지는 고기의 조화는 고단한 삶의 연속인 서민들에게는 유쾌하고 멋진 순간이다. 주변의 해장국집과 우동집과 수제빵집의 신비스런 맛 또한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해는 저물고 찬 바람이 밀려온다. 귀가를 재촉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도시는 적막하며 네온사인조차 궁핍하다. 불현듯, 내가 살고 있는 청주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묻고 싶어졌다. 욕망을 쫓는데 급급한 나머지 진정한 청주정신이 무엇인지, 청주의 경쟁력은 무엇인지, 그리하여 나는 청주를 사랑하고 있는지 묻고 싶어졌다.

돌이켜보니 청주는 내가 겪은 세상의 도시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였다. 상당산성과 중앙공원을 중심으로 한 천년의 숨결이 살아 숨쉬고, 근현대의 고단하지만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온 낮고 느린 도시의 풍경이 우리 곁에 있으며, 가로수길과 무심천과 도시 곳곳의 생태숲에서는 맑은 기운이 끼쳐온다. 전국에서 도서관이 가장 많고, 국립청주박물관을 비롯해 박물관 미술관에서는 연중 다채로운 전시문화가 펼쳐지며, 시립예술단을 비롯해 수많은 예술단체의 공연은 우리를 유쾌한 예술세계로 초대한다. 공예비엔날레를 비롯한 크고 작은 축제가 있고, 청주만의 질박하지만 깊은 맛을 주는 음식이 도처에 있으며, 도시와 농촌의 경계가 없이 오달진 풍경들로 가득하다.

다만, 사람들은 우리 것에 대한 소중함과 가치를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있으며, 타인의 이야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는 바로 대한민국 청주인데 말이다. 꽃도 지고, 잎도 지고, 향기도 사라졌다며 돌아오지 않을 청춘을 아쉬어할 게 아니라 내 마음의 향과 결을 만드는 일부터 해야겠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아운 도시 청주를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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