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변광섭 청주시문화재단 문화예술부장

찬바람이 매섭지만 햇살은 눈부시다. 어제의 태양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새로운 햇살이 아침의 문을 열었다. 마음에 가시를 품은 듯 아픈 세월은 가고, 새순 돋고 꽃 피며 열매 맺는, 그리하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의 연속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2014년의 첫 문을 열었다. 어느 시인은 첫날의 의미를 시작이자 격류이고 혁명이며, 떨림이고 설렘이자 기쁨이라고 노래했다.

연말연시엔 잡다한 생각을 내려놓기 위해 옷을 주섬주섬 입고 대지의 여행을 떠났다. 국립청주박물관을 한 바퀴 돌고 청주향교와 옛 충북도지사 관사의 오솔길을 걸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서운동, 대성동, 수암골, 안덕벌 일원을 낮고 느린 도시, 청주만의 맑고 향기로움을 간직한 멋과 낭만과 아름다움의 텃밭으로 가꾸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왔다. 그리고 상당산성을 한 바퀴 돌며 이런저런 생각에 젖었다. 바람숫긴 산길은 호젓하고, 호수는 눈부시며, 자연은 엄연한데 나의 마음은 가난할 뿐이었다.

고요는 내적혁명의 단초라고 했던가. 북풍한설 속에 자연은 고요하고, 그 속의 온갖 생명들은 정중동(靜中動)이다. 그토록 찬란하게 노래하던 대지의 악동들과 짙푸른 녹음과 붉은 단풍들이 제 다 옷을 벗었다. 더 이상 잃을 게 없다며 초연한 모습은 당당하다. 욕심과 집착에서 벗어나야 비움에 이르고, 그 비움 속에서 생명의 근원을 찾을 수 있으니, 머잖아 새싹이 움트고, 만화방창 꽃들의 잔치가 펼쳐지며, 알곡 진 열매를 맺으리라. 꽉 찬 달은 곧 이지러짐의 시작이고, 겨울이 깊을수록 꽃봉오리는 더욱 도톰해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나는 해야 할 일, 가 야할 길 앞에서 머뭇거리며 삿된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지난 한 해 바쁘고 고단하며 번잡한 삶의 연속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하면서도 진정한 나의 일과 나의 길을 만드는 일에 소홀히 했다.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무심한 채 삶의 에너지를 고갈시키며 불평과 불만과 불안의 육두문자를 날리기도 했다. 어느 시인은 "벼락과 해일이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일지라도, 오라, 길이여, 그 길을 가마! 꽃아, 꽃아, 문 열어라. 문 밖은 우리의 세상, 동티 없는 나날들이구나"라며 새 날의 축복을 노래했다. 나도 저 대자연처럼 버려야 할 때 버릴 줄 알고, 돋음과 펼침과 나눔을 실천해 왔는지, 그리하여 세상을 향해 온몸을 내 던지며 달려왔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한 평생을 살면서 중요하지 않은 순간이 어디 있겠냐만 그래도 2014년은 개인적으로, 역사적으로, 지역적으로 그 어느 해 보다 중요하기에 새 날을 여는 마음이 무겁다. 청주시와 청원군이 하나가 돼 '더 큰 청주'를 만들어야 한다. 100만 청주의 청사진을 제시하고 이끌어 갈 수 있는 일꾼을 뽑아야 한다. 우리 지역만의 고유한 삶과 멋과 가치를 찾아내야 하며, 갈등과 대립과 반목의 역사에서 상생과 화합과 번영의 새 역사를 만들어야 한다.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는 전환점에 서 있는 것이다. 상대주의와 냉소주의, 그리고 이념의 갈등이 횡행하고 국가 간의 혼란과 위기도 우리가 극복해야 할 과제로 남아있다. 나 역시 불혹을 넘어 지천명에 들어서니 질풍노도와 도약의 시기를 지나, 좌절과 변화와 도전의 시간을 지나, 새로운 창조와 균형과 조화를 꾀하는 한 해가 되면 좋겠다.

스피노자는 "모든 가치 있는 것은 드물고 어렵다"고 했다. 시인 장석주는 <대추 한 알>이라는 시를 통해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 없다/저 안에 태풍 몇 개/저 안에 천둥 몇 개/저 안에 벼락 몇 개"라며 고난이 생명을 더욱 숙성시킨다고 했다. 시인 김종해는 <그대 앞에 봄이 있다>라는 시를 통해 "상처받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추운 겨울 다 지내고/꽃 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고 했다. 진정한 사랑은 일순간을 황홀 속에 불 타 소진하는 것이 아니라 아픔을 딛고 일어나 불멸의 향기를 전해 준다. 이처럼 사람은 고뇌를 통해 더욱 단단해지니 시민들이여, 절망하지 말자. 절망은 좌절을 부르고 죽음을 재촉할 뿐이니 모두의 마음속에 붉은 태양 하나씩 간직하자. 자연에 대한 사랑, 이웃에 대한 연민, 자유와 정의에 대한 참여, 내가 살고 있는 도시에 대한 꿈과 열정, 나와 조직과 사회에 대한 책무, 그리고 더불어 함께 춤추고 노래하며 나눔을 실천하자. 맑은 샘물처럼 끝없이 솟아나는 향기로운 삶, 내 인생의 도파민을 만들자. 그러니 오라, 새 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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