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변광섭 청주시문화재단 문화예술부장

신 새벽의 찬 공기를 뚫고 상당산성을 올랐다. 10년 째 이 길을 오르내리는데, 오늘 나는 의연하게 솟아 있는 소나무숲에서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늘 보던 소나무였다. 어린 시절에는 앞산, 뒷산 할 것 없이 온통 소나무 숲이었다. 꽃이 피고 녹음 우거지며 단풍으로 붉게 물들고 벌거벗은 나목으로 북풍한설을 버티는 다른 나무와 달리 소나무는 계절이 바뀌어도, 거센 바람과 폭풍이 몰아쳐도 항상 변함없이 푸른 기상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나는 갑자기 소나무 앞에서 고립돼 있을까.

처음에는 바람의 소리인 줄 알았다. 언제나 이 길을 지날 때는 바람 섞인 차가운 소리가 귓볼을 때렸는데, 나는 그것이 햇살과 바람이 합궁을 하거나, 북풍한설을 피해 소나무 숲에 앉아있는 바람의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바람이 아니라 소나무의 울음이라는 생각에 젖었다. 소나무도 꽃이 피고 송홧가루 흩날린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또 늦가을부터 겨울 내내 낡을 옷을 벗어 버리고 새로운 잎새를 피우느라 고단한 생의 연속이라는 것도 뒤늦게 알았다.

눈보라와 태풍과 마른장마와 천둥번개 같은 공포의 시간을 견디느라 온 몸이 부르트고 갈라져도 군말 한 마디 하지 못했다. 이따금 나무꾼이 서슬퍼런 도끼나 날카로운 톱을 들고 서성거릴때는 오금이 저려 죽는 줄 알았다. 등산객들은 오가면서 침을 뱉고 잔가지를 부러뜨리기도 했으며, 돌팔매질을 하거나 발길질도 서슴치 않았는데 그 때마다 온 몸이 찢기고 멍들어 성할 날이 없었다. 그래도 참고 버텨야 했던 것은 숲 속의 친구들을 생각했기 때문이고, 천년을 외마디 비명 없이 견뎌온 성곽 때문이고,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샘물과 외로울 때마다 벗이 되어준 산새들과 들짐승 때문이었다.

그날 소나무는 울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에게 아프다는 말 한 마디, 헛헛하고 고단하다는 표현 한 번 하지 못하고 속으로, 속으로 울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상처가 하나씩 생겼다. 그 상처가 번지고 번져 온 몸이 부서질 지경이지만 그 때마다 속으로, 속으로 울고 말아야 했다.

어떤 소나무는 그 울음을 참지 못해 옹이 지고 뒤틀리기도 했으며, 또 다른 소나무는 어느 사찰의 배흘림기둥이 되어 모란 무늬로 남기도 했다. 그리고 어떤 소나무는 마른 장작이 되어 한옥집의 불쏘시개로 활활 타 오르기도 했으며, 청춘남녀의 사랑을 노래하는 모닥불이 되거나 세상 사람들의 삶을 디자인하는 기구로 변신하기도 했다.

운 좋게 젊은 작가를 만난 소나무는 거대한 설치작품으로 새롭게 태어나면서 세상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청주시문화재단 1층에 있는 조형물도 그 중의 하나다. 하나의 장작개비는 불쏘시개밖에 안되겠지만 여러 개가 모이니 거대한 예술의 숲으로 새롭게 탄생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소나무가 개나리나 진달래처럼 소란스럽게 꽃대를 치켜세우며 세상 사람들이나 현혹시키는데 몰입했다면 이렇게 두 번의 생을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수많은 세월의 아픔을 견디고 이겨냈기 때문에, 상처를 보듬고 다시 일어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오늘 소나무숲에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나눈 누구이고, 무엇 때문에 이곳에 서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하며, 무엇으로 살고 있는가, 그리하여 나는 세상 사람들과 세상의 생명들에게 맑고 향기로운 벗으로 남아 있는가.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욕망의 덫에 걸려 구린내 가득하고, 회색도시의 골목길에서 청춘을 방기하며 살아온 내게도 희망이 있는지, 아니 소나무 앞에 당당하게 서 있을 자격이 있는지 생각했다.

도종환 시인은 '흔들리며 피는 꽃'에서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며 고단한 노정을 이겨내야만 진정한 사랑이 움튼다고 노래했다.

미국 경영학계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하버드 경영대학원 최고의 교수로 꼽히는 하워드 스티븐스는 "그 무엇도 쉽게 얻어지는 것은 없으니 실패를 딛고 전진할 것이며, 실패를 통해 더 많은 것을 배워야한다"고 했다.

인생은 어렵다고 생각할 때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이다. 소나무가 속으로 울며 더 큰 생명의 꿈을 키우듯이 우리도 아픔과 역경을 딛고 더 큰 미래, 더 멋진 삶의 곡조를 만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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