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서동석 우석대학교 교수

대화가 통하는 사람과는 늘 사람에 대해 얘기하고 산다. "사람은 참 착해, 그런데…." 착한 사람이라고 진심으로 칭찬한 다음에 반드시 따르는 것이 '그런데…'라는 안타까움이 서린 다음말이 이어진다.

착하다고 회자되는 사람들은 대개 성실하고 진지하게 자신의 삶을 꾸리지만, 현실적으로는 자신의 분야에서 아직 일가를 이루지 못하고 재정적으로도 어려운 상황에서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도덕 교과서의 주장과는 달리 '착함'이 항상 대접받지는 않는다. 그들의 공통점은 자기주장을 하지 않고 어떤 사안에 대해서 통찰력 있는 발언을 하지 않는다.

지식과 정보에 과잉 노출된 현대인에게 불안은 질병이다. 불안하기 때문에 침묵한다. 불안정성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하루하루가 똑같은 고정된 삶, 개성이 사라진 획일적인 삶, 심지어 일상적인 억압마저도 받아들인다.

부조리한 것들을 침묵하고 우물우물하면서 수용하면 "착한사람"이 된다.

이런 외부 세계에서 나타나는 현상에 속지 않기 위해 해석과 통찰력이, 자신의 내면을 정면으로 응시하기 위한 성찰이 필요하다.

소설가 장정일 선생은 '공부'의 서문에서 "내가 '중용의 사람'이 되고자 했던 노력은, 우리사회의 가치를 내면화하고자 했기 때문도 맞지만, 실제로는 무식하고 무지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그렇다. 어떤 사안에서든 그저 중립이나 중용만 취하고 있으면 무지가 드러나지 않을 뿐 더러, 원만한 인격의 소유자로까지 떠받들어진다. 나의 중용은 무지였다."라고 했다.

중용은 본래 칼날 위에 서는 것인데 그것에 대한 사유와 고민 없이 무지의 중용을 빙자한, 처세만을 위한 '양비론의 천사'들이 너무 많다.

중용이 미덕인 우리사회의 요구와 압력을 모범적으로 내면화하고 비겁하게 수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처세란 세상과 교류하는 방법이다. 처세술이 술책을 생각하는 권모술수의 기술로 뒤바뀐 개념으로 사용되는 현대사회는 그만큼 좋은 삶의 환경이 아니라는 방증이다.

문화예술계에서 밥 먹고 사는 사람들, 소위 예술인들은 '착한사람'이 많다.

소비자본주의 체제에서 상대적으로 재정적으로 열악한 경우가 많고, 사회가 요구하는 고정된 규범이나 가치에 박자를 맞추기보다는 엇박자를 즐기고, 더구나 논리적이기보다는 감성이 강한 사람들이라 쉽게 상처를 받는다. 한편으로 세상살이 문제들을 자신만의 언어(작품)로 말하지만 다의적인 예술언어는 사회에 직접적으로 닿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착한사람'이 많다.

하지만 이제는 착한 사람이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혹자는 문화예술계가 말도 많고 탈도 많아 소란스럽다고 핀잔한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핀잔이다. 물론 힘 있는 자들은 자신들이 프로그래밍한대로 조용하고 무탈하게 세상이 굴러가길 원하겠지만, 창조의 원동력인 자유로운 상상력과 다양성이 생명인 문화예술계는 조용하면 죽은 것이다.

자유로워지기, 일상을 새롭게 생각해 보기, 과거에 짓눌리지 않기를 시작하도록 이끌어 주는 동력, 권태로운 일상의 프로그래밍에서 벗어나는 변화에 영감을 주는 예술이 조용할 수 없다.

사람이 삶의 지표를 찾아가는 데 있어서 예술과 인문학의 힘은 중요하다.

무력과 자괴감의 포위망에서 벗어나 일상을 자율적으로 자신감 있게 새로 시작하도록 이끌어주는 근원적인 힘이다.

예술적 상상력은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힘이다.

필자는 예술적 상상력이 넘치는 사회가 진짜 좋은 사회라고 믿는다.

주변 지인들로부터 '착한사람'이라는 애정 어린 칭찬을 듣고 있다면, 용기를 내야 한다.

확실하게 편들기 위해 공부해야 하고, 자유의지로 선택하고 발언해야 한다.

"자유 의지라는 것은 '자유로운 선택'이 아니라 '자유를 선택하는 것'이다." 스콜라 철학의 시조인 안셀무스의 말이다.

자유의지는 자유롭게 아무거나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유는 옳은 것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편들기도 하고, 목소리 높여서 자기주장을 펼쳐야 한다. 그리고 그 착한 사람의 목소리가 크게 들리는 세상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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