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변광섭 청주시문화재단 문화예술부장

꽃도 지고, 잎도 지고, 향기도 사라진 도시가 흰 빛으로 순연하다. 갈피마다 스며드는 골목길을 빛따라, 여운따라 나섰다. 삶의 현장은 언제나 각다분하기 때문에 기쁜날보다 번뇌로 뒤척이는 날이 더 많다. 욕망에 젖은 도시의 풍경, 그리고 사람들의 애환과 미련과 추억이 도처에 시름시름 앓고 있다. 그 희미한 실루엣이 슬쩍 어깨를 스쳐가도 온 몸이 오그라들지 않던가.

그날 저녁, 도청 뒷길을 걷다가 마주친 불빛이 가뜩이나 상처 많은 내 마음 속으로 밀려왔다. 학교운동장을 수놓은 불빛이었다. 1946년에 개교한 중앙초등학교 운동장을 가득 메운 불꽃, 그리고 불꽃 사이로 대나무 숲과 설치미술의 풍경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 숲을 따라 안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도심공동화 현상으로 학생들이 감소하자 불가피하게 학교를 이전해야 하고, 이러한 안타까움을 '오래된 미래'라는 주제로 석별의 정을 나누고 있었다.

67년의 역사를 어찌 쉽게 잊을 수 있을까. 학교측에서는 그 아쉬움을 담아 골목이 있는 풍경전, 그 때 그 시절 교과서전, 추억의 음악다방 DJ전, 미니콘서트, 인문학 특강 등 주민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었다. 떠나야 하는 먹먹한 마음을 문화예술로 승화시켰기에 아름다웠다. 만남도 중요하지만 헤어지는 그 순간이 더 값지고 소중해야 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했다.

나는 운동장 안팎을 한참이나 서성거렸다. 그리고 청주향교와 옛 도지사관사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고려시대에 문을 연 청주향교는 세종대왕이 1444년에 초정리에서 행궁을 짓고 요양하며 한글창제에 몰두하면서 이곳에 책 9권을 하사했고, 20년 후 세조가 속리산 가는 길에 들러 며칠동안 머무른 곳이다. 이후 청주는 학문의 중심으로, 교육의 중심으로 발전해 오지 않았던가.

도지사관사는 일제시대 건립된 이래 역대 도지사의 사저로 사용되었으며, 지금은 충북문화관으로 새롭게 선을 보였다. 일제시대의 건축양식과 오래된 숲속의 풍경이 조화를 이루는 아날로그의 향기로움이 끼쳐온다.

그러고 보니 이 일대에는 근대문화유산이 적잖다.

중앙초등학교 뒤에 위치한 우리예능원은 1924년 충북금융조합 사무실 용도로 일본인에 의해, 일본식 건축양식으로 세워졌다. 일제시대에는 청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으로 꼽혔는데 1954년부터 청주 YMCA(기독교청년회) 회관으로 사용했으며, 지금은 유치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아담한 정원, 2층의 방갈로풍의 목조함석집은 식민지시대의 문화 상징물로 역사성과 그 시대의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건축물이다.

어디 이 뿐인가. 일제강점기에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6개동의 청주양관은 서양의 건축양식과 한옥의 기법이 조화를 이루고 있고, 충북도청 본관 역시 일제시대에 적벽돌로 지어진 건축물이다.

또한 근대 초기의 모더니즘 건축기법을 보여주고 있는 충북산업장려관, 와우산 자락 작은 동산에 여덟 팔(八)자 모양식 양식으로 지어진 성공회성당, 일제강점기에 팔작지붕형태로 지어진 원불교 청주교당, 1923년 수질 검사를 위해 종탑 형식으로 지어진 동부 배수지…. 이 모든 건축물들은 대성동, 탑동, 문화동 일대에 분포돼 있는데 이 일대에는 백년 안팎의 한옥이 수백 채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이들 공간과 인접해 있는 성안길을 생각해 보자. 비록 일제에 위해 읍성이 헐려 흔적을 찾을 수는 없지만 천년의 청주정신을 담고 있는 곳이 아니던가. 성안길에는 천년된 은행나무 압각수, 국보 41호 용두사지철당간, 공민왕이 과거를 열었던 망선루, 청주의 수령이 근무하던 청주동헌 청녕각, 아름다운 건축미를 뽐내는 충청병마절도사 영문, 마르지 않는 샘물 등 역사적인 자원이 있으며, 땅속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돌다리인 남석교가 살아 숨쉬고 있다.

맑고 향기로운 청주정신을 찾고, 새로운 미래의 문을 여는데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을까. 이것들을 스토리텔링으로 엮고, 문화예술로 꽃을 피우며, 관광콘텐츠로 특화해야 할 것이다.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으로, 만화방창[萬化方暢) 문화의 꽃을 피우자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