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준 칼럼] 논설실장·대기자

부자는 망해도 삼대(三代)는 간다. 하지만 재벌은 망할 일이 없다. 기업은 죽어도 기업인은 잘먹고 잘살기 때문이다.

허재호씨(전 대주그룹회장)는 망한 기업인이다. 그러나 그는 이리저리 빼돌린 돈으로 여전히 재벌처럼 생활을 하고 있다. 주택사업이 호황일 때 '대주 피오레' 브랜드의 아파트 사업을 주축으로 임대형 민자사업(BTL), 토목, 건축 등에서 불꽃처럼 성장하면서 창업·기업합병 등을 통해 조선, 금융, 해운, 미디어, 레저, 문화 등 30여개 계열사를 거느린 대주그룹을 탄생시켰다.

2006년 무렵 매출액이 1조2천억원대를 넘나들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비윤리적인 기업은 오래갈 수 없다. 그해 허 회장이 500억원대의 법인세 포탈, 100억원대 회삿돈 횡령 등의 혐의로 사법처리되고 부동산 침체와 글로벌 금융위기로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그러나 그는 그 이전에 인생 2막을 꿈꿨다. 2002년 처음으로 뉴질랜드에 진출한 뒤 건설사와 창업투자사 등 17개 법인을 설립했다.

허 전 회장이 2011년 6월까지 뉴질랜드에 투자한 금액은 3천500만 달러(약 370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그의 가족이 오클랜드에 보유한 땅도 수백억원대다. 시차적으로 볼 때 고의부도일 수도 있다는 의혹을 제기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황제노역' 사건은 그리 새삼스럽지 않다. 그의 치부 뿐만 아니라 법조계의 병폐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났지만 어쩌면 시간이 지나면 아주 조용히 묻힐 가능성이 있다. 그런 사례는 많았다. 법원에서 거액의 추징금을 선고받고 '배째라'며 버티는 재벌은 허씨 뿐아니다.

몇년전 모주간지 보도에 따르면 10억원이 넘는 추징금 미납자는 200여명에 달한다. 액수로는 24조5천억원에 달한다고 한다. 서울시 한해 예산과 비슷한 규모다. 지금은 사람도 금액도 늘었을 것이다. 이중에는 유명인사들이 많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회장을 비롯 최순영 전신동아그룹회장, 권노갑 민주당 고문 등이 리스트에 올라있다.

자신 명의 재산이 없어 겉으로만 빈털털이일뿐 이들은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상류생활을 누리고 있다.

추징금이 23조원이 넘는 김 전 회장은 하룻밤 숙박료가 1천100만원 정도인 서울 밀레니엄 힐튼호텔 23층 273평짜리 팬트하우스를 집무실로 사용해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추징금이 1천574억원인 최순영 신동아그룹회장은 서울 한남동 유엔빌리지에 고급 빌라(83평)를 소유하고 있다. 매입가가 35억원인 것으로 보도됐다. 서민들은 그냥 줘도 유지관리비 때문에 살기 어려운 집이다.

지난 2000년 총선을 앞두고 고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으로부터 200억원을 받은 혐의로 추징금 150억원을 선고받은 권노갑씨는 지금까지 300여 만원만 납부했다고 한다. 신연식 전 한국예원대 이사장과 조영주 전 KTF 사장도 각각 13억원과 24억원을 내지 않고 있다. 버티면 잊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허재호 전 회장이 재산이 없어 황제노역 판결을 받은 것이 아니듯 이들도 돈이 없어 추징금을 안내는 것 같지는 않다. 이들이 힘에 부치는 추징금 때문에 거리에 나앉거나 때꺼리가 없어서 고생했다는 얘기를 들어본적이 없다.

자신명의 재산을 차명으로 은닉해 호외호식하고 있는지 세상사람들은 다 안다. 물론 소위 전두환 추징법이 지난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지만 얼마나 실효성을 가질 것인지는 두고봐야 한다.

반면 서민들은 파산하면 철저히 빼앗긴다. 서울 세모녀 자살사건의 주인공들은 가장이 사업에 실패하고 빚더미에 오른뒤 사망하면서 중산층에서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자살직전까지도 공과금 60만원과 편지를 써놓고 미안함과 괴로움을 드러냈다.

허씨는 가족들을 설득해서 벌금을 내겠다고 했지만 믿긴 어렵다. 적당히 내고 버틸 가능성이 높다. 냄비처럼 뜨거워진 비난과 비판이 식을 때를 기다릴지도 모른다. 어디 허씨뿐일까.

그가 세금을 포탈하고 회삿돈을 횡령하고 은행돈을 떼먹은 돈으로 뉴질랜드로 건너가 수년간 천혜의 자연환경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며 사업을 확장하는동안 비호하거나 팔짱을 끼고 지켜본 힘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사법부가 들끓는 여론과 언론의 질타에 환형유치기준을 마련하고 향판제도를 개선하는 등 호들갑을 떨고 있다고 해서 세상이 바로설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제도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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