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세에 시집 '회상(回想)' 펴낸 김정숙 할머니

"세월은 유수와 같아서 어느덧 내 나이 90이 넘었는데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해놓은 일이 너무 없는 것 같아서 조그만 공책 앞뒤에 순서도 모르게 쓴 글이라도 후손들에게 남기고 싶어 작은 시집으로 묶었지요. 두서없이 쓴 글이라서 보는 이들은 웃음이 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최선을 다했어요."

올해 91세를 맞은 김정숙 할머니(청주시 복대동)는 단아한 모습에 소녀같은 웃음을 지으며 연신 쑥스러워 했다. 김 할머니는 길을 가다가 나무라도 한 그루가 눈에 들어오면 그 자리에서 시가 한 수 떠올라 집에 와서 옮겨쓰곤 했는데 그런 시 50편이 시집 '회상(回想)'에 담겼다.

봄햇살을 보며 떠오르는대로 쓴 시가 '春光'이다. '매정한 雪寒風에 / 옷긴 여민제 / 어제인 듯한데 / 어느덧 아차한 봄빛 / 뜨락 앞에 아지랑이 / 봄을 부르듯 / 大門 앞에 梧桐 / 무심코 바라보니 / 새싹을 틔울 듯 / 微笑짓고 서있네'

또 어느 가을날 창가에 한마리 여치가 올라와 우는 모습을 보고 '窓가의 여치'라는 시를 썼다. '서늘한 창가에 여치 / 구슬픈 울음소리 / 얼마 남지 않은 시간 / 가을을 재촉하듯 / 이 밤이 새도록 힘차게 / 울어라 여치야 / 깊은 가을 밤 행진곡으로 / 겨울에는 네 울음소리도 / 다시 그리워지겠지'

김 할머니는 글을 쓰고 외우고 하는 것이 어린시절부터 그렇게 좋았다고 한다. 지금도 두통이 있을 때 2시간이고 3시간이고 글을 쓰다보면 두통도 사라진다며 글과 인연이 깊은 인생인가 보라고 했다. 혼자 쓰고 익힌 명심보감과 교동보통학교 시절 잠깐 배운 일본어를 독학해 환갑 즈음엔 청주시 율량동에 '명심한문교습소'를 내서 70이 넘을 때까지 운영하기도 했다. 지금도 같은 아파트에 사는 중학생 대여섯명에게 명심보감을 가르치고 있다.

글을 좋아해서 그런지 아직까지 눈도 밝아 신문의 작은 글씨까지도 다 읽는다는 김 할머니는 지난해 가을에는 한 시민단체 초청으로 '인문학교실 - 명심보감 이야기' 특강을 하기도 했는데, 특강 자료 하나없이 칠판에 필기하고 뜻풀이를 척척해 참가 학생들에게 놀라움을 자아냈다고.

"이 나이까지 세월을 살아보니까 역시 마음이 중요해. 자기 복은 남이 주는게 아니라 내가 만드는 거드라구. 그럴려면 착하고 정직하게 살아야 해요. 슬픔, 기쁨이 다 마음에서 나오는거야. 忍一時之念이면 免百日之憂니라. 한때 분함을 참으면 백일의 근심이 없어진다고 했어요."

아침 6시에 일어나 경전 보고 아침 먹고 신문, 옥편을 읽고 한문 필기를 하며 하루를 지내는 김 할머니는 늘 책을 보고 생각을 많이 하는 것이 아마도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몸의 건강비결인 것 같다고 말했다.

김 할머니의 아들 정화진(전 KBS 청주방송총국 문화사업부장)씨는 "어머니는 언제나 자기관리가 철저한 올곧은 분이셨어요. 어머니가 항상 강조하신 것이 '정직하게 살아라'입니다. 어린시절, 잘못한 일도 솔직히 말하면 용서해 주셨지만 거짓말을 하면 정말 많이 혼났어요. 이런 어머니를 둔 것이 항상 나의 복이라고 생각하죠. 꼿꼿하신 어머니 덕분에 우리 1남4녀가 잘 자랐고 오래오래 건강하셔서 지금처럼 우리의 정신적 기둥이 되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바람을 전했다. / 송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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