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준 칼럼] 논설실장·대기자

한국 정치사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하 노무현)만큼 독특한 캐릭터는 없을 것이다. 영화 '변호인'에서 잘 묘사된 대로 상고출신 변호사로 정치에 입문해 초선의원 시절인 5공 청문회때 거물급 증인들에게 호통을 치고 촌철살인(寸鐵殺人)의 거침없는 언변으로 주목을 받았다.

특히 노무현이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명패를 집어 던진 일화는 아직도 회자(膾炙)될 정도다. 하지만 노무현을 나중에 대통령으로 밀어붙인 힘은 '청문회 스타'였기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인 소신과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는 뚝심 때문이다. 정계에 오래 몸담았지만 그가 국회의원 배지를 단 것은 몇년에 불과하다. 1988년 부산서 통일민주당으로 당선됐으나 이후 네차례 총선과 지방선거에서 모두 패했다. 그중 세번이 당시 야권의 불모지였던 부산서 도전했으나 좌절했다. 민주당 간판으로 수도권이나 호남을 택했으면 무조건 당선됐을 노무현이 부산을 선택한 것은 한국정치의 고질적인 병폐인 '지역주의'를 무너뜨리기 위해서였다.

'바보 노무현'이라는 말은 이래서 나왔다. 하지만 그는 졌지만 이겼다. 개인적으로 '대통령 노무현'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노무현의 '소신과 뚝심'은 정치인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하긴 그 덕목을 가슴에 담아야 할 사람들이 어디 정치인뿐일까.

요즘 바보 노무현을 벤치마킹하겠다는 정치인이 있다. 안철수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다. 민주당과 통합후 첫번째 의원총회에 참석한 안 대표의 일성은 '바보 노무현論'이었다. 그는 "국민을 믿고 가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바보 같다는 평을 들으면서도 끊임없이 자기희생 하는 모습을 보였고, 결국 국민은 그를 대통령까지 만들어줬다. (기초선거 무공천은)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 국민을 믿고 가야 한다는 데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그때가 3월말이니 불과 보름전 얘기다. 안 대표 역시 노무현이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에 대해선 바보라는 말을 들을 만큼 우직하게 밀고 나가는 모습에 감명을 받았을 것이다.

이 때문에 안 대표는 그날 세가지 당부사항을 제시했다.

"첫째, (기초선거 무공천은) 국민을 믿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자. 정말 머리를 맞대어 창의적인 방법을 생각해 내고 정면으로 돌파하면 국민은 우리의 진심을 믿어줄 것이다. 둘째, 약속을 꼭 지켜야 한다. 셋째, 민생 중심으로 가자"는 것이다. 그가 민주당과 통합한 이후 취임일성이자, 정당대표로 첫번째 선거를 치르면서 기초선거 무공천을 꺼냈을 때 사람들은 지방선거 패배라는 작은 이익을 버리더라도 대선이라는 더 큰 꿈을 이루겠다는 의도를 엿보았을 것이다.

물론 그는 보름만에 자신의 뜻을 철회했다. 그것도 국민과 당원여론에 맡기는 방식으로 말이다. 어차피 새누리당이 먼저 당내 논란끝에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공약을 어겼으니 새정치민주연합만 꼭 지킬 이유는 없다. 이상(理想)만 갖고 정치현실을 극복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무공천을 '여론'을 빙자해 포기한것은 웬지 '면피'한듯한 인상을 준다. "국민의 뜻을 존중하겠다"는 '여론정치'는 기성정치인들이 흔히 써먹던 수법이다.

여론정치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의 기본은 바로 국민의 참여와 관심 속에서 크고 자라는 것이다. 자칫 높은 탑 속에 갇혀버릴 정치가 국민 여론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마음을 헤아려준다면 정말로 꼭 필요한 정책을 적재적소에 배치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론 주권재민의 원칙에 맞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여론정치가 횡행하면 폐해도 적잖게 드러난다. 정치권력을 가진 힘있는 정치인이 대중을 조종해 정치·사회적으로 악용하는 여론조작이 난무하고, 다수에 의해 소수가 일방적으로 희생되는 폐해도 잇따를 수 있다. 무엇보다 여론에 의하여 좌우되는 정치는 바람직한 정책적 기능이 마비되 정치적 지도이념이 의심받을 수 있다. 이번 경우가 그렇다. 더구나 여론조사 결과는 생물처럼 끊임없이 바뀐다.

정치 지도자가 여론에 끌려다니면 올바른 정치와 미래지향적인 계획을 세우기는 힘들 것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이나 포항제철, 금융실명제, 세종시를 추진하면서 국민여론을 수렴했으면 과연 가능했을까. 비단 안대표 뿐만 아니다. 지도자는 미래를 내다봐야 한다. 때론 '바보같다'는 말을 듣더라고 그것이 지역과 국가를 위해 옳은 일이라면 우직하게 자신의 길을 갔어야 했다. 그는 노무현에게 무엇을 배운걸까. 기초선거 무공천은 이미 끝난 얘기지만 그 다음이 문제다. 아무래도 안 대표는 노무현과는 다른 길을 걸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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