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준 칼럼] 논설실장·대기자

국립과학원이 지난해 전국 273개 가구의 수돗물과 정수기물을 조사했다. 조사결과는 뜻밖이었다. 수돗물은 모두 음용수로 적합했지만 정수기물은 절반가까이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 수돗물은 이제껏 주로 세탁이나 설겆이할때만 쓰는 물로 홀대받았다. 하지만 수돗물은 강이나 호수에서 취수할때부터 싱크대 수돗꼭지를 통해 쏟아질때까지 과정을 살펴보면 정수기보다 못할게 하나도 없다. 무려 여덞번의 과정을 거치니 정수기보다 더 안전하다는 말이 나올법하다. 그렇지만 수돗물을 직접 마시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K-water가 조사한 수돗물 직접 음용률은 6% 미만이었다. 선진국(미국 56%, 캐나다 47%, 일본 33%)에 비하면 턱없이 낮은 수치다. 반면 먹는물 시장은 해마다 커져 올해는 6천억원을 넘어설 것으로 조사됐다. 정수기 시장은 1조를 넘을 것이다. 왜 멀쩡한 수돗물을 놔두고 생수를 사먹고 품질도 의심스러운 정수기를 들여놓을까. 이는 막연하고 과도한 수돗물에 대한 소비자의 불신 탓이다. 한컵의 깨끗한 수돗물을 만들기 위해 K-water가 엄청난 예산과 노력을 기울인 것을 감안하면 안타까울 정도다.

하지만 수돗물을 정부에 대한 불신과 비교하면 '새발의 피'다. 돈으로 환산하기 힘들만큼 우리사회에 엄청난 타격을 줄수도 있기 때문이다. 굉장히 우려할만한 상황이지만 우리사회에 국가에 대한 불신이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는 사례는 많다. 물론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MB정부시절 광우병 파동이 그렇다. 정부에서 아무리 괜찮다고 호소해도 미국산 소고기를 수입해 먹으면 금방 인간 광우병에 감염될 것처럼 전국이 들끓었다. 천안함 폭침은 여전히 자작극이 판친다. 영국, 스웨덴 등 5개국 전문가들이 합동으로 조사해 북한잠수정의 어뢰를 맞아 침몰했다고 공식발표해도 믿지않는다.

세월호 참사도 마찬가지다. 끊임없이 정부를 불신하는 유언비어와 음모가 판을 치고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면 또 다른 대상을 찾아 물고늘어진다. 사고해역은 물살이 쎄 '다이빙벨'을 써야 소용없다는 군과 전문가 입장에도 돈벌이에 눈이 먼 민간업체의 주장을 액면그대로 받아들이다. 시신의 주인공을 정확히 확인하기 위해 DNA채취를 하는 과정에 정부가 의도적으로 시신을 인도하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시신을 빨리 인도해 시신이 뒤바뀐 경우엔 제대로 DNA검사를 안했다며 공격을 당한다. 일부 언론의 무분별한 취재경쟁까지 가세해 불신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장관의 말도, 국무총리의 말도 통하지 않는다. 심지어 대통령의 말에도 의혹의 눈초리를 보낸다. 지엽적인 내용은 시간이 지나면 금방 사실이 드러난다. 문제는 전쟁이나 대형재난이 발생하는 위급한 상황에서 국민들이 과연 정부의 통제를 따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물론 수돗물을 불신하는 것이 소비자탓이 아니듯 정부에 대한 불신이 국민들 탓만은 아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수돗물을 마시지 않는 것은 오랫동안 겪어왔던 학습효과 때문이다. 수돗물에서 냄새가 나거나 이물질이 섞여있는 것을 본 소비자들은 최근 몇년간 K-water가 철저히 품질관리해 정수기보다 낫다는 판정을 받아도 여전히 의심을 거두진 않는다. 정부가 신뢰를 잃은것은 스스로 자초한 측면이 있다. 위기상황때마다 기본과 원칙을 망각한채 번복과 혼선을 초래한 정부 당국자의 행태에 믿음을 갖기는 힘들다.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신뢰'(trust)라는 저서에서 신뢰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사회의 축적된 자본 중, 가장 중요한 자본이 '신뢰'라는 것이다. 고(高)신뢰 사회는 무한대의 성장 가능성이 있지만, 저(低)신뢰사회는 거래비용의 증대로 성장의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고 지적했다. 며칠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36개국 회원사의 '2014 더 나은 삶 지수(Better Life Index)'를 보면 우리나라는 국민의 23%만이 정부를 신뢰했다. 국민 10명중 8명은 정부를 불신한다는 얘기다. 조사대상국중 29위였다. 국가 신뢰지수로 볼때 스위스(77%), 룩셈부르크(74%), 노르웨이(66%)등 유럽 국가는 물론 OECD 평균(38.9%)에 크게 밑돌았다.

대다수 국민들은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등 시스템 전반에 대해 투명하지 않고 믿을 수 없다'고 느끼고 있다. 이러니 아무리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라고 자랑해도 선진국 문턱을 넘기는 커녕 2류국가라는 조롱을 듣는 것이다. 국민들로 부터 불신받는 국가의 미래는 불안하다. 불신이 치러야 할 대가를 감안하면 박근혜 정부의 국가개조 프로젝트는 국가에 대한 신뢰회복에서 출발해야 한다 . / sjpark@jb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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