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 외 6명 '번번이 동백을 놓치다' 발간 … 10년만의 의기투합 다양한 주제 담아

'시의 시대는 갔다. 갔던가? 갔을 것이다. 시가 담론의 주류인 시대는 벌써 1980년대에 갔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시는 언제나 그랬다. 한국 현대시 100년, 우리는 자유시인 듯한 정형시의 시대를 사는 중이다. 그 정형시를 자유시로 되살리는 길은, 벌처럼 꽃 속으로 온몸을 던지는 일이다. 시가 무엇이 될지를 묻지 말고, 시가 마술처럼 피어나는 삶의 순간 속으로 파고드는 일이다.'

시가 사라져가는 시대에 시에 대한 고민을 담은 시집 '번번이 동백을 놓치다'(고두미)가 정진명 시인의 엮음으로 출간됐다. 이 시집에는 정진명 시인 외에 안미현, 양용직, 김종우, 박윤배, 류정환, 최선자 시인의 작품이 함께 실려있다.

'버린다 / 꽁꽁 싸매 이사를 몇 번 하도록 / 셀 수 없이 많은 봄이 왔다 가도록 / 시들지 않도록, 썩지 않도록 / 냉장에 넣었다 / 냉동에 넣었다, 했던 / 곰팡이 핀 가루를 버린다 / 몇 겹씩 싸여진 그것이 / 무엇의 가루인지 알지 못한다 / 다만, 징그럽다는 것 / 징글징글해서 / 한 톨 미련마저 없어진 / 내 눈물의 가루였건 / 목마른 영혼의 가루였건 / 덧없는 시간의 가루였건 / 이젠 안녕이다'

-안미현 作 '징그러운, 안녕'

안미현 시인은 분홍 젤리 물고기, 생일, 첫 눈, 나뭇잎 하나, 가짜 비, 문병 가는 길 등의 작품을 통해 여성 특유의 섬세한 감성을 전달하고 있다. 안 시인은 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일상의 작은 감정들을 잘 잡아내는 능력이 뛰어나고 군더더기 없이 표현해 내는 작가로 평가되고 있다.

양용직 시인은 각질, 눈물, 남해, 해장국으로 속을 풀다, 국기게양대 등 우리가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소재들을 한발짝 물러서서 바라보며 그만의 독특한 시상을 전달하고 있으며, 김종우 시인은 낙타를 쫓아가는 저녁, 말, 굴뚝새, 우주의 무게, 시가 쓰고 싶은 저녁, 텅 빈 오후의 장례식장 등 현실의 아픔을 이야기하면서도 노동자의 삶 등 다소 무거운 주제도 얼마든지 아름다운 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정진명 시인은 8개의 '방' 시리즈 작품을 싣고 있다. 과거 구체적이고 현실성을 담은 시를 노래 했던 것과 달리 이번 방시리즈에서는 우리가 만나는 사물이나 현상 속에 숨어있는 우주의 비밀을 추상적이며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둥●에는 점이 있고 / 둥근 방에는 초점이 있다 / 실재하진 않지만 / 그것이 아니면 동그라미가 존재할 수 없는 / 가장 작은 / 방 / 점 / 우주가 축소된 점은 / 점이 아니라 / 방이다 / 그 방으로 하여 동그라미가 좀 찌그러져도 지구가 그 길을 따라 달려가고 / 그 방으로 하여 동그라미가 좀 잘려나가도 스케이트보드, 비보이춤이 이루어진다 … 중략 … 그 초점에 매인 별들이 / 밤새 동그라미를 그리다가 / 햇빛 속으로 몸을 감춘다/'- 정진명 作 '방 34'

박윤배 시인은 인간의 감정에서 영원한 주제인 성(性)에 주목하고 있다. 꽃의 진화, 애인, 앵속, 어처구니, 눈먼 사랑, 포옹, 분홍 침묵 등의 시를 통해 자칫 추해지거나 지저분해 질 수 있는 성이라는 소재를 짧으면서도 발랄하게 노래해 눈길을 끌고 있다.

이번 시집은 엮은 정진명 시인은 "10여년 전에 '깨어있는 시정신'을 모토로 모였던 젊은 시인들이 다시 뭉쳐 이번 시집을 발간하게 됐다"며 "많은 단체들이 생겨나면서 많은 시인들이 제도권으로 들어간 작금의 현실 속에서 제도권 밖의 작품활동도 살아있는 문학이고 시라는 생각에서 의기투합한 의미있는 시집"이라고 밝혔다. / 송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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