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크리스마스 교황의 길을 찾아서]⑧충남의 성지 서산 해미순교성지

충남 서산 해미순교성지는 다른 어떠한 순교지보다 참혹했던 핍박의 흔적을 간직한 곳이다. 천주교 박해가 심해진 1790년부터 100여 년 동안 수천 명이 순교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6일 서산시 해미면 한서대학교에서 해미읍성까지 도보순례를, 오후에는 해미읍성에서 한류문화 체험을 위한 순례 페스티벌에 참가한다. 17일 오전에는 해미순교성지에서 아시아 주교회의에 참석한 후 오후 해미읍성에서 아시아·한국 청년대회 피날레를 장식하는 폐막미사를 집전할 계획이다. 해미순교성지의 순교 역사를 살펴봤다. / 편집자






충남 서산 해미순교성지에서 가장 먼저 순례자를 맞이하는 것은 해미순교성지 입석이다. 신앙 선조들의 죽음의 행렬을 묵묵히 지켜온 한티고개에 있던 돌이 지금 자리로 옮겨져 생매장 순교 현장을 알리고 있다.

'해뫼'라고도 불리는 해미는 조선 초기 병마절도사의 치소가 있던 곳이었다. 조선 중기 현으로 축소됐으며 무관 영장이 현감을 겸하며 국사범을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된다.

해미읍성에 있는 해미진영 큰 감옥 두 채에는 항상 천주학 죄인들이 가득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군졸 들은 천주학 신도들을 해미 진영 서문 밖으로 끌어내 교수, 참수, 몰매질, 석형, 백지사형, 동사형으로 죽였다고 하는데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로 내를 이루었다는 기록이 전해질 정도이니 박해 정도가 얼마나 심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죄수의 팔다리를 잡고 들어서 메어치는 자리개질, 큰 구덩이를 만들어 산 사람을 밀어 넣고 흙과 자갈로 끌어 묻어버렸던 생매장, 개울 둠벙에 죄인들을 묶어 물속에 빠뜨려 죽이는 수장법 등 잔인한 박해로 인해 순교자들은 헤아릴 수가 없는 정도였다.

'여숫골'이라고도 불리는 해미순교성지는 1866년부터 1872년 사이 1천명 이상이 생매장을 당했던 장소다. 1935년 일부 유해가 발굴됐지만 대부분 홍수로 유실됐다고 전해진다. 순교성지에는 이름 모를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해 1975년 높이 16m의 탑을 세웠다.

여숫골은 '예수 마리아' 기도 소리를 '여수머리'로 알아듣던 주민들에 의해 오늘날 '여숫골'로 불리고 있다.

여숫골에서 농사를 짓던 사람들은 순교자의 뼈를 캐내 냇물에 버렸다고 하는데 1985년 해미본당이 설립된 이후에야 성역화 사업이 진행됐다. 이곳이 생매장터라는 사실은 농부들의 증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농사를 짓는 연장 끝에 걸려 캐낸 뼈의 대부분이 수직으로 서 있는 상태로 발견됐다는 점인데, 이는 살아 있는 사람이 묻혔다는 증거가 되고 있다.

무명 순교자의 대부분은 서민층 신자들로 추정되고 있다. 해미 진영이 독자 처결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고는 하나, 사후 문책 거리가 될 만한 신분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기록에 남기지 않았고 마구잡이로 처형했다.

한국에서 유일한 생매장 순교터라는 점, 순교자의 유해가 확인 발굴되고 보존돼 왔다는 점에서 해미순교 성지는 교회사적으로나 지역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해미성지의 순교 역사는 박해기 순교자들의 기록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해미순교성지의 자료에 따르면 1801년의 신유박해 이전에는 인언민(마르티노)과 이보현(프란치스코)이 순교했고, 1811~1839년 기해박해 이전에는 김진후(비오)가 1814년에 옥사한 것을 비롯해 모두 8명이 순교했다.

프란치스코 교황 방문 시 해미순교자 인언민 마르티노, 김진후 비오, 이보현 흐란치스코 3위의 시복식이 이뤄진다.


1866년 이후 병인박해기에는 122명에 달하는 순교자가 해미에서 탄생하는 등 132명의 유명 순교자가 파악되고 있고, 47명의 무명 순교자까지 포함하면 179명의 순교자가 탄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해미성지는 해미읍성 안 진영 동헌 앞, 옥사를 신앙 증거 장소면서 순교 터로 소개하고 있다. 또한 서문 밖의 교수형 터, 조산리 생매장 터도 교회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장소가 되고 있다.

다른 어떤 순교지보다도 생생한 핍박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해미성지. 박해기 100년 동안 참혹했던 현장에서는 실제로 얼마나 많은 순교자들이 스러져 갔는지 파악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가톨릭출판사에서 펴낸 '하늘에서 땅 끝까지-향내 나는 구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는 해미성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성지로 한티고개를 꼽는다.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에도 기록돼 있는 이 고개는 죽음의 길로 악명이 높았다.

해미성지는 본당 설립 이후 순교 선열 현양회가 발족됐으며 1999년 성전 건립 기금을 모금하면서 마침내 2000년 8월 기공식을 했다. 최근에는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을 앞두고 성지를 찾는 순례객들의 발길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 기획취재팀



▶ 순교 자리개 돌= 해미읍성 서문 밖 수구 위에 놓여 있던 돌다리. 병인박해 때 형벌 역사상 찾아볼 수 없는 남형이 유일하게 집행된 곳이다. 남형은 함부로 형벌을 가하는 것으로, 사람의 머리를 쇠도리깨로 치거나 큰 돌다리 위에 머리를 놓고 쳐서 죽이는 자리개질 등을 행했다. 서문 밖 순교지에 보존 중이었지만 해미도시계획 도로개설로 인해 생매장 순교성지(여숫골)로 2009년 1월 8일 옮겨졌다.

▶호야나무= 해미 진영(지금의 해미읍성) 두 채의 큰 감옥을 복원한 옥사 옆에 위치한 회화나무. 손발을 묶이고 머리채를 묶인 순교자들이 매달려 고문당했던 나무로, 고문대로 쓰였다. 해미지역 방언인 '호야나무'로 불리고 있으며, 가지에는 지금도 고문 당시 흔적이 남아 있다고 전해진다. 그 옆에는 한티고개를 넘어 내포지방에서 끌려온 천주학 죄인들과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가 옥사한 감옥 터가 있다.

▶진둠벙= 죄인들이 떨어져 죽었다고 해서 동네 사람들이 '죄인 둠벙'이라고 불렀다. 팔을 묶어 끌려오던 신자들을 거꾸로 떨어뜨려서 둠벙 속에 처박혀 죽게 했다. 순교한 후 물이 십자가 모양으로 갈라졌다 해서 '십자둠벙'이라 부르기도 한다. 병인박해 당시 십 수 명씩을 생매장하러 가는 길에 큰 개울을 만나게 되는데 외나무다리 밑 물길에 패인 둠벙이 있어 죄인들을 둠벙에 밀어 넣었다고 전해진다.



■서산지역 주요 행사

방문일 시 간 주 요 행 사 장 소
8월 16일(토) 14:00-17:00 도보 성지순례(4.5㎞), 6천명 참가 한서대→해미읍성
20:00-23:00 파이널 페스티벌, 6천명 참가 충남 서산 해미읍성
8월 17일(일) 11:20-12:00 아시아 주교들과의 만남(오찬) 충남 서산 해미순교성지
16:30-18:30 교황 집전 청년대회 폐막미사 충남 서산 해미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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