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오늘은 사망·실종자가 29명에 달하는 대형사고인 충주호 화재 참사가 발생한지 꼭 20주년이 되는 날이다.

충주호유람선은 1994년 10월 24일 오후 단양읍의 신단양선착장에서 승무원 3명을 포함한 132명의 승객을 싣고 충주를 향해 운항하던중 적성면 애월읍 상진대교 부근에서 화재가 발생해 불과 한시간만에 전소된 당시로써는 대형 수상 재난사고였다.

당시 사고현장은 20년만에 발생한 세월호유람선 참사와 판박이처럼 흡사해 놀라움을 준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지만 유람선업체의 도덕적 해이, 승무원의 승객에 대한 안전조치 미흡, 행정기관의 관리부실, 심지어 해당 선박이 사고 1년전 한국선급의 정기검사를 합격한 것까지 우리사회의 안전시스템은 한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다.

화재가 발생하자 승무원들은 승객들을 선실로 몰아 넣었다. 선실 내부는 연기로 자욱했고, 문은 열리지 않았다. 승객들에게 구명 조끼는 지급되지 않았다. 남자 승객들은 선실 유리를 깨고 선실내의 승객들을 끌어냈고, 인근의 유람선과 어선이 물에 뛰어든 승객들을 구조했다. 단양읍 인접한 곳에서 사고가 터졌지만 경찰, 공무원, 소방대원들은 사건이 발생한지 한 시간이 지나서야 현장에 도착했다. 이튿날인 10월 25일까지 모두 25구의 시신이 인양됐고, 5명은 실종됐다. 생존한 102명 중 33명은 중경상을 입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오른팔로 불렸던 최형우 내무부장관(현 안전행정부장관)은 사고현장에 저녁늦게 도착해 희생자 가족들로부터 욕설을 듣는 망신을 당했다.

사고 직후 총체적인 문제점이 드러났다. 공무원과 승무원들은 승선인원 파악도 제대로 못했다.

또 업체에선 한푼이라도 더 벌기위해 승선인원을 초과해서 승객을 태웠다. FRP로 제작된 유람선은 화재가 발생하면서 유독가스를 내뽐어 대다수 사상자들이 피하지 못한 채 질식해 쓰러졌다. 화창한 가을날씨의 잔잔한 충주호에서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어처구니 없는 재난사고였다.

충주호유람선이 정원만 승선시키고 원칙에 입각해 안전수칙만 제대로 지켰으면 참사는 방지할 수 있었다.

승무원들이 직업윤리를 갖고 침착하게 대응하거나 단양선착장에 파견나왔던 공무원이 정원에 맞춰 승선자 명단만 확인했으면 사상자가 줄어들 수 있었다.

이 사건 이후 우리나라의 재난관리시스템은 얼마나 발전했을까. 결론적으로 별로 변한게 없다. 충주호유람선은 화재사고로 수많은 사상자를 냈지만 몇 년 뒤 464명 정원에 900여명을 태워 적발되기도 했다.

1994년 충주호 유람선 화재사고 당시에도 운항하던 유람선이 지금도 관광객을 태우고 있다. 내수면 선박 선령을 규정하는 근거 규정도 '선령 20년, 10년간 별도 검사'로 애매하게 돼있다. 규정대로 하면 충주호유람선에는 선령 규제조차 없는 셈이 된다.

사고만 발생하면 법령정비는 하지않은 채 목소리만 높히며 정쟁만 일삼는 정치인, 복지부동한 공직자, 사람의 생명보다 돈에 연연하는 기업체가 변하지 않는 현실에서 대형사고가 줄어들리 없다. 20년 간극을 두고 일어난 충주호화재사고와 세월호 참사가 뼈아픈 교훈이 되지 않는다면 재난의 위협은 언제든 부메랑으로 되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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