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역사의 뿌리로서 부모산, 신봉동 백제고분 등 여러 곳을 꼽게 되지만 청주의 진산(鎭山), 우암산(牛巖山)을 빼놓을 수 없다. 각급학교 교가에 거의, 우암산이 등장하듯 누가 뭐래도 우암산은 청주역사의 1번지이다.
 우암산은 향토사의 보고(寶庫)다. 그곳엔 청주에서 정북동 토성과 더불어 가장 먼저 쌓은 토성이 있고 수많은 절터, 암자가 있으며 민속자료도 수풀사이로 널려있다.
 일설에는 우암산에 8만9암자가 있다고 전해지나 이는 상징적 의미이고 실제로 오늘날 조사된 절터는 20여곳에 불과하다.
 우암산의 백미는 역시 토성이다. 우암산의 토성은 순전히 흙으로만 쌓은 것이 아니라 돌을 섞어 쌓았다. 우암산 정상부에서 계곡을 따라 쌓았는데 그 길이가 4km로 상당상성 둘레와 엇비슷하다.
 오늘날 토성은 등산로로 바뀌었다. 삼일공원에서 우암산으로 오르는 길, 그 자체가 토성 뚝이다. 등산인파가 늘어나면서 성뚝은 점차 넓어지고 훼손돼 간다. 오르막길 중간 부분에는 토성아래로 국궁장이 있는데 토성쪽으로 확장하려다 토성의 훼손이 우려된다는 학계의 지적에 따라 옆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서쪽벽 쪽으로는 훼손이 심하여 전문가가 아니면 토성인지 아닌지 구별을 할 수 없을 정도다. 여기에 비해 북벽, 동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가파른 자연지세를 이용하여 쌓은 토성이 뚜렷하고 성벽이 확연하다. 성뚝을 따라서는 할석(막돌)이 쭉 박혀 있는데 이것은 바로 여장(女墻)의 흔적이다. 여장이란 성벽위에 다시 쌓은 작은 담장으로 이 역시 방어시설이다.
 우암산 토성 뚝을 따라서는 할석과 함께 수많은 기와편이 널려있다. 아마도 여장을 쌓은후 기와를 얹져마무리를 한게 아닌가 추정된다.
 우암산 토성 동쪽벽은 훼손이 덜돼 있다. 곳곳에는 「토성을 보호합시다」라는 팻말이 보인다. 서쪽보다는 동쪽벽이 훨씬 견고하다. 백제쪽 보다는 신라쪽을 방어한듯 하다.
 이 토성은 백제 상당현(上黨縣)의 치소(治所:행정의 중심지)로 강력히 추정되는 곳이다. 삼국중에서 청주를 가장 먼저 차지한 백제가 이곳에 토성을 쌓고 청주를 경영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후 상당산성이 축조되면서 상대적으로 우암산 토성의 기능은 쇠퇴했지만 후대에도 방어시설로 무시할수 없는 비중을 차지했던것 같다.
 우암산 토성은 남행을 하면서 청주 향교를 지나 당산(唐山) 토성과 연결된다. 이 연결되는 부분을 이원근씨 등은 청주의 나성(羅城:동네 전체를 감싸는 외곽성)으로 보았지만 당산 토성에서 내려와 청주전체를 감싸는 나성이 있었을 법도 하다는 가설이 최근에 나오고 있다.
 태조 왕건이 930년(태조13년), 청주에 행차하여 나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고려사절요에 나오는데다 거란족의 침입을 막아낸후 개경 나성을 축조한 총 감독이 청주출신의 이가도(李可道)였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즉 청주에서 나성을 쌓은 축성의 노하우를 개경에 적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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