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준 칼럼] 논설실장·대기자

율곡 이이가 어느날 밤늦게 한양 시내를 순시하다가 낭랑한 목소리로 병서 읽는 소리를 들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이순신이라는 것을 알았다. "평화 시에 이렇게 병서를 읽는 선비가 있구나"하고 감탄했으나 그를 만나 보지는 않았다. 율곡이 당시 관리를 뽑는 銓衡官(전형관)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부정부패는 반드시 뇌물을 주고받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뇌물을 안 주고 안 받았어도 당사자끼리 서로 만났다면 뇌물이 오간 것으로 의심 받았다. 그래서 율곡은 괜한 오해를 살까봐 이순신을 만나지 않은 것이다. 역사학자인 박성수 교수가 쓴 '부패의 역사 - 부정부패의 뿌리, 조선을 국문한다'에 나오는 얘기다. 뒤에서 거액을 받아 챙기고도 '대가성 없다'는 말한마디면 미꾸라지 처럼 법망을 빠져나오는 오늘의 정치인·공직자와 비교하면 조선은 믿을 수 없이 깨끗한 '1급수'의 나라였다는 생각이 든다. 조선왕조는 한때 청빈한 선비가 사는 청백리의 나라였다. 하지만 조선후기로 접어들면서 탐관오리가 판을 쳤다. 조선말 일본천황으로 부터 하사금이라는 이름의 뇌물을 받고 나라를 팔아넘기는데 앞장섰던 친일파가 득세할 정도였다. 지난 100년간의 소위 식민지화, 경제개발 그리고 민주화 과정에서 부정부패의 나라로 급변했다. 마치 깨끗했던 강물이 기름과 폐기물로 갑자기 오염되듯이 순식간에 더러운 나라로 변한 것이다. 부정부패는 갈수록 대형화하고 세계화하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시각이다.

뇌물의 역사는 역사는 유구하다. 구약성서에도 나온다. 神은 모세에게 경고했다. "그대는 뇌물을 받지 말라. 그것은 현명한 사람의 눈을 멀게 하느니라". 하지만 뇌물문화는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더 번성했다. '뇌물은 사회의 윤활유'였다. 미국식 표현이다. 돈으로 기름칠하지 않으면 내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는것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뿐 우리나라나 선진국이나 마찬가지다.

다만 우리나라는 압축성장과정에서 무엇이든지 빨리빨리 하지 않으면 뒤쳐질수 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뇌물의 규모도 커지고 폭넓게 확산됐다. 심지어 스승의 날에도 학부모가 학교를 찾아갈 수 없게 만드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더구나 아직도 행정규제 혁파가 국가의 아젠다가 될 정도로 각종 규제가 촘촘한 그물처럼 쳐졌다. 법을 만드는 정치인과 법을 집행하는 공무원들이 우월적 지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중국이나 이탈리아식 표현으로 '가속비(가속비)나 급행료(라코만디 치우니)를 주지 않으면 도무지 되는일이 없다. 1992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게리맥커 박사는 '규제는 부패를 낳는다, 규제가 많을수록 더 많은 부패를 남긴다 '는 말을 남겼지만 공직자가 '갑'이 될 수 있는 것이 그만한 권한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공무원들이 이권과 관련된 누군가에게 '검은손'을 내밀거나 얄팍한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는 이유다.

부정부패에 관한한 대한민국은 후진국이다. 국민권익위원회가 '김영란법'('부정청탁금지및 공직자의 이해충돌방지법')'으로 불리는 강력한 법안을 만든것은 공직비리가 도를 넘었기 때문이다. 이 법이 2012년 8월 입법예고된지 2년 5개월만에 지난주 국회법안심사소위를 통과했다. 후진국형 비리를 막자는게 김영란법을 제정한 배경이지만 여야는 말로는 필요성을 외치면서 법안을 완화하려고 하거나 시간을 끌었다. 여기에 사립학교와 언론사등 민간영역까지 법적용 대상에 포함시켰다. 정치인들의 '잔머리'가 고스란히 엿보인다. 이런 사람들이 정치를하고 있으니 국가개조가 얼마나 험난할지 안봐도 뻔하다.

'김영란법'의 제정은 매우 의미가 있지만 뿌리를 내리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관료주의적인 습성이 금방 변하지 않는다. 중세유럽의 얘기다. 소매치기가 하도 극성을 부려 백성들의 원성이 들끊자 왕은 결단을 내렸다. 소매치기가 비록 잡범이지만 교수형에 처하기로 한것이다. 광장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한 가운데 소매치기범에 대한 교수형이 열렸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도 소매치기범들은 남의 돈을 훔쳤다고 한다. 고질적인 범죄의 사슬을 끊기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준다. 오죽하면 뇌물은 '치료불가능한 한국병'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김영란법이 공직비리를 막기위한 묘책이라고 볼 수는 없다. 더 중요한것은 국민의 마인드가 달라져야 한다. 몇년전 뉴스워크지는 부패에 관한 특집에서 "공무원을 후하게 대접하고 언론과 사법의 고발을 장려하고 시민의 도덕심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결론을 맺었다. 공무원뿐만 아니라 사회 구성원이 함께 변해야 한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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