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변광섭 동아시아문화도시 사무국장

새해 벽두부터 북풍한설이 몰아쳤다. 눈발은 거세고 바람의 서슬이 빌딩사이에서 부딪쳤다. 하늘의 일은 알기 어렵고, 마음의 길은 끝이 없어 심란한데 바깥 풍경마저 위태로워 한 참을 길 한 가운데서 서성거렸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고, 세상에서 가장 좋은 시를 쓰고, 세상에서 가장 멋진 춤을 추자고 다짐했는데 비굴하고 슬픔에 잠긴 내 모습이 안쓰러웠다.

오동나무는 천 년이 되어도 항상 제 곡조를 간직하고, 매화는 평생을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고 했다. 수묵화는 먹 가는 일부터 수행이라고 했고, 밭가는 소는 뒤를 보지 않는다고 했는데 나는 사소한 일에 상처받고 흥분하며 번뇌에 젖는다.

꽃도 지고, 잎도 지고, 향기도 사라진 그 자리에 차디찬 바람과 흰 빛으로 순연한 자연을 보며 다짐한다. 최고의 날, 가장 아름다운 날을 위해 머뭇거리지 말고 나의 길을 가자.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되고, 세상과 함께하는 햇살이 되며, 세상의 아픔을 보듬는 큰 사람이 되자.

크리에이터 이어령과 한참을 이야기 한 뒤 나의 다짐은 더욱 분명해졌다. 하루를 살아도 엄연하게, 하나의 일을 해도 명쾌하게, 세상과의 인연에도 나만의 결과 멋과 향기로움을 만들어야겠다는 것이다. 크리에이터 이어령은 팔순을 넘긴 지금 이 시간에도 끝없는 연구와 집필과 창의적인 콘텐츠 개발에 몰두하는데 지천명의 내가 머뭇거리고 있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웠다.

이어령은 동아시아문화도시의 방향에 대해서도 기존의 관습과 형식으로부터 벗어나 청주만의 문화적인 멋과 향과 결과 꿈을 담아야 한다고 했다. '가장 지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며 지역 문화의 세계화, 글로벌화를 강조했다. 그동안 지역 주민들이 중요하지 않게 여겼던 것들, 예컨대 마을 곳곳에 우뚝 서 있는 보호수를 문화적 스토리텔링으로 특화하거나 소로리볍씨를 활용한 세계적인 문화상품을 만드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일회성, 이벤트성 행사가 아니라 생산적이고 창의적인 콘텐츠를 발굴하고 미래지향적인 가치를 담는 일에 힘쓸 것을 강조했다. 기자회견을 통해 청주시가 생명도시, 디지로그시티를 지향해야 한다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한중일 창의학교를 운영해 창조경제, 문화융성을 중심으로 한 한국인의 DNA가 동아시아와 함께하고 글로벌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존행사와의 연계협력도 중요하다.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는 올해로 16년째를 맞이하고 있지만 지역주민들조차 기대 반 우려 반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베니스비엔날레처럼 세계 각국의 문화예술인들이 고대하며 시대의 담론을 제시하는 비엔날레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혁신적인 요소가 필요한데 지금이 터닝포인트이며 골든타임이다. 지역 행사로 머물고 있는 세종대왕과 초정약수축제, 청원생명축제, 청주읍성큰잔치 등도 지구촌을 품을 수 있는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이번 기회를 활용해 동아시아와 함께 손을 잡고 참여와 협력, 네트워크와 마케팅 등을 전개하지 못한다면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청주와 세계가 하나되는 콘텐츠 발굴도 중요하다고 했다. 중국과 일본이 준비하고 있는 프로그램과의 연계성, 지역 주민이 의미있게 참여할 수 있는 전략, 지역과 전국이 하나되는 아이템 등을 강조한 것이다.

특히 '고향의 꿈' 프로젝트를 통해 드라마작가 김수현, 한글디자이너 안상수, 설치미술가 강익중 등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지역 출신의 인사들과 협력해 새로운 문화브랜드를 만들자고 했다. 이름하여 homecoming Day인 것이다. 지역의 역사자원, 문화기반 시설, 시민 동아리, 생활 공동체 등의 유무형 자산과 삶의 가치를 창의적이고 지속 가능한 사업으로 연계시킬 수 있는 지혜도 필요하다.

풀씨들은 제 몸 열 배도 넘는 흙을 밀치고 올라온다. 꽃과 열매는 언제나 새 눈에서만 피어난다. 혹한을 견뎌내야만 새순이 돋고, 비바람을 이겨내야만 값진 열매를 맺는다. 옳은 길은 이처럼 불가사의하고 고되지만 분명하다. 동아시아로 가는 길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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