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변광섭 동아시아문화도시 사무국장

'태교신기(胎敎新記)'. 청주에서 태어난 사주당이씨가 쓴 조선시대 태교 백과사전이다. 세계 최초의 태교관련 책으로 기록될만한 이 책은 사주당의 성리학적인 식견과 사유를 바탕으로 자신의 체험을 정리한 책인데 태교의 중요성을 이론과 실천적 사실을 바탕으로 설명하고 있다. 뱃속 열 달이 출생 후 10년의 가르침보다 더 중요하다며 바르게 보고 듣고 행동하는 자세를 통해 뱃속에서부터 제대로 된 교육을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사주당이 태교신기와 같은 훌륭한 저술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사서삼경, 제자백가와 의학까지 두루 통달한 학문의 깊이를 바탕으로 태교를 연구하려는 자세와 네 자녀를 통한 시험적 태도, 또한 이를 정리하고 기록하는 실천력 등이 융합됐기 때문이다.

'명심보감明心寶鑑)'. 어린이들의 인격 수양을 위해 중국 고전에서 선현들의 금언(金言)과 명구(名句)를 편집해 만든 윤리교육 책으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 한문을 배우기 시작할 때 천자문(千字文)을 익힌 다음 '동몽선습(童蒙先習)'과 함께 기초 과정의 교재로 사용됐다. 최근까지도 교양서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으며, 개그맨 김병조씨가 이를 쉽고 재미있게 강의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책에는 '안분신무욕(安分身無辱) 지기심자한(知機心自閑)'이란 구절이 있는데 분수를 알고 지키면 일신에 욕됨이 없고,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면 마음이 절로 한가해진다는 뜻이다. 이 책이 청주에서 인쇄됐다고 하는데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

서원향약. 선조 4년 율곡 이이가 청주목사로 있으면서 만든 제도로 도덕적 질서와 미풍양속을 진작시키며 재난을 당했을 때 상부상조하기 위해 만든 사회적 규약이다. 중종 때 정계에 진출한 조광조 등 사림파의 주장으로 전국에 확산됐는데 선(善)을 권장하고 악(惡)을 징계하는 세칙을 규정하고 있다. 부모에 대한 효도, 형제간의 우애, 청렴하고 은혜를 베푸는 삶, 환난시 조력하고 사회적으로 책임있는 행동을 강조했다. 율곡은 임금은 백성을 하늘로 삼고 백성은 생업을 하늘로 삼으니 만약 백성이 하늘로 삼는 것을 잃게 되면 나라는 의지할 데를 잃어버리게 되므로 '안민'이야말로 왕도정치의 근본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앞서 고려 말 홍건적의 침입 때 공민왕이 청주에 6개월간 머무르면서 과거시험을 직접 관장했으며, 세종대왕은 1444년 두 차례에 걸쳐 초정행궁을 짓고 조선의 르네상스를 펼쳤다. 세종은 이곳에서 한글을 창제한 뒤 다듬는 일을 했으며, 청주향교에 책을 9권 하사했다. 박연에게 편경을 만들게 했으며, 마을 노인들을 초청해 양로연을 베풀고, 우리나라 최초의 국민투표를 통해 조세법을 개정하고 시범으로 도입하기도 했다. 성삼문, 신숙주 등의 대신과 학자들도 생명의 가치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읊고 노래했다. 이같은 역사적 정기를 이어받아 단재 신채호를 비롯한 수많은 학자와 독립운동가를 배출했고, 교육도시·문화도시로 발전하게 됐다.

이어령 동아시아문화도시 명예조직위원장은 청주야말로 대한민국 최고의 생명도시, 생명의 모항(母港)이라고 했다. 앞서 설명한 역사적 DNA를 시작으로 사계절 푸른 기운으로 가득한 가로수길, 느리고 수줍게 흐르는 무심천, 바람과 숲의 비밀을 간직한 대청호와 옥화구곡, 역사의 숲 상당산성 등 때묻지 않은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소로리볍씨는 중국 후난성(湖南省) 출토 볍씨보다 절대 연대 값이 3천여 년이나 앞선 1만5천년 전 것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맛있는 쌀이 이곳에서 생산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닐까.

생명의 모항은 오송 바이오산업과 문화산업, 그리고 시민사회의 창조적인 커뮤니티로 이어지고 있다. 동아시아문화도시를 향한 항해도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청주만이 갖고 있는 역사문화적 가치를 글로벌콘텐츠로 특화하고, 도시의 공간을 생명의 숲과 예술의 바다로 만들며, 사람들의 가슴 따뜻한 이야기가 물결치면 좋겠다. 사랑하는 자는 말이 없다고 했던가. 세상 사람들이 청주를 사랑하고, 청주를 존경하며, 청주정신을 담으려는 발길이 이어지는 날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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