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세운동 주역 박동희 선생 태형 60대에 유공자 불인정 뒤늦게 한 사망신고도 발목 국가보훈처 공훈 추서 제외 자손들 명예회복 '동분서주' 증빙자료 소실 증언도 허사

 "만세운동을 하다 현장에서 체포돼 갖은 고문과 태형 60대를 맞고 후유증으로 사망했지만 형량미달로 아직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해 3대째 가슴에 한을 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청산만세 운동을 주도하다 붙잡혀 모진 고문과 태형 60대의 형을 받고 풀려 난 뒤 23세의 나이에 순국한 박동희 선생(1897~1919)의 손자 박연호씨(49)는 3대째 독립운동 유공자 추서의 한을 풀지 못했다.

 국가보훈처는 지난해 11월 25일 옥천군 청산면 출생지와 옥천향토전시관에서 공훈 추서를 위한 증거 및 자료 수집을 했으나 증거가 불충분하다며 유공자로 선정하지 않았다.

 옥천군 청산면 만세운동의 주역인 박동희 선생의 사망시점과 호적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다.

 옥천군지 등 자료와 유족에 따르면 박동희 선생은 충북 옥천군 청산면 백운리에서 태어나 당시 23세에 주도적으로 청산 만세운동을 벌이다 일경에 체포돼 태형 60대를 맞고 고통을 이기지 못해 수개월 후 순국했다.

 박동희 선생은 1919년 3월3일 청산장날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벌이기 몇일 전부터 동료 박재호, 안병하, 김복만 지사 등과 마을에서 회합을 갖고 태극기를 몰래 만들어 3일동안 청산면 만리방천(萬里防川)에서 3.1만세운동을 벌이며 독립을 외쳤다.

 3월 6일 당시 청산만세운동을 진압한 일본 헌병대의 발포로 만세를 부르던 청산 주민 5명이 현장에서 숨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청산면 지전리 장터에서 피를 흘리며 신음소리와 함께 아수라장이 되어 부상자가 속출했다.

 이같은 강력한 헌병대의 진압으로 시위 군중들은 일시적으로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박동희 지사는 맨주먹으로 일본 헌병대에 대항하다 결국 체포되어 공주 교도소에 수감됐다.

 교도소에 수감 중에 일본 경찰의 잔인한 고문과 태형 60대를 맞고 풀려났으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5개월 후 23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해 독립의 기쁨을 함께하지 못했다.

 박동희 선생의 사망시점은 태형을 받은 1919년 4월 3일(범죄인명부 기록) 이후 5개월 뒤였다는 것이 만세운동을 함께한 주민과 유족들의 증언이다.

 하지만 박연호씨의 할머니는 학교를 다니지 못해 글을 알지 못했고 일제강점기 시대에 신고 절차 등을 제대로 몰라 뒤늦게 당국에 신고했기 때문에 호적에는 사망후 5년 뒤인 1924년 6월8일 사망으로 기록된 것이 문제가 됐다.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1919년 만세운동이후 태형으로 사망했다는 증거가 없었고 태형 90대 이상은 유공자 선정대상이지만 박동희 선생은 60대의 태형을 받아 추서하기 곤란해 사망시점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박동희 선생의 부인인 김영희 할머니는 홀로 어렵게 키운 외아들 박주현(사망)씨에게 선친의 명예회복을 유언했다.

 박주현씨는 할머니의 유지를 받아 공주지방법원에 박동희선생의 수감 자료를 찾아 보았지만 6.25사변 당시 서류일체가 부산지방검찰청으로 이관됐다는 말을 듣고 직접 부산지방검찰청 등지로 증빙자료를 찾기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6.25전쟁당시 서류일체가 소실되어 남아 있지 않다는 담당자들의 답변을 듣고 눈물을 훔치며 돌아섰다고 한다.

 손자 박연호씨는 "독립만세운동을 함께했던 여도근, 임해용, 이호용, 박철희, 박석희, 박도희씨 등은 우리가 죽고 나면 박동희 선생의 순국사실이 영원히 땅속에 묻힐 수밖에 없다며 隣佑證明書(인우증명서)를 작성해 서명 날인한 증명서를 보훈처에서 보관하고 있다"며 증거불충분을 반박했다.

 또한 다른 증인 이호용씨 역시 "박동희 선생이 대전형무소에서 돌아왔을 때 만세주동자로 몰려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문과 매질을 당해 초죽음이 되어 있었다"고 증언했지만 모두 허사였다.

 박연호씨는 "할아버지의 독립만세운동의 사실들이 구체적이고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서류상 절차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와 태형 90대는 독립유공자로 인정되고 60대는 형량미달이라는 검증 잣대가 너무나 불합리하다"며 "중요한 것은 독립만세운동의 주역이고 태형을 맞은 것"이라고 말했다.

 청와대 경비대에 근무하는 박연호 경장과 교사로 활동중인 부인 오경란(41)씨가 2년전 국가보훈처에 보낸 서신에는 할머니가 홀로 외아들을 어렵게 키워온 과정과 "한을 풀어 달라"는 선친의 유훈을 받들고자 하는 애국심과 효심이 절절이 배어 있다.

 보훈처 공훈심사과 관계자는 "청산면 현지를 방문해 사료를 조사하고 마을 주민들과 지인을 만나 확인했지만 사망시점이 명확하지 않고 증거자료가 희박해 공훈 추서를 하지 못했다"며 "오는 8월15일까지 재심사를 거쳐 추서 여부를 결정하게 될 것"이고 밝혔다. 윤여군 / 옥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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