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변광섭 동아시아문화도시 조직위원회 사무국장

보리가 익기만을 기다리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름을 몰라 보리밥을 깜깜한 밥, 쌀밥을 그냥 '환한 밥'이라 불렀던 배고픈 아이들의 기억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보릿고개를 넘다가 아이들은 배웠습니다. 보리는 모든 곡식이 사라진 뒤에도 홀로 서리 내린 벌판 위에서 일어선다는 것을, 땅이 얼수록 뿌리는 단단해지고 밟힐수록 잎은 더 무성해진다는것을 눈물로 참고 땀으로 일하는 끈기도 배웠습니다. "남들도 먹어야 살지." 밥 한 숟가락 남기는 가난 속의 예절도 익혔습니다.

보세요. 지금 그 애들이 보릿고개를 넘어 우리에게 왔습니다. 가슴 한아름 보리밭의 추억을 안고 생명쌀 그득히 한 짐 지고 여기 모였습니다. 문명에 오염된 도시의 보릿고개를 넘기 위해 한국의 도시, 아시아의 도시, 세계의 도시들이 청주의 맑고 깨끗한 생명력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은 청맥이 황맥이 되는 시간, 맑을 淸, 나눔의 幸, 끝없는 배움의 學, 근본의 本, 그리고 아름다운 매듭처럼 잇고 어울리는 結이여, 和여! 아시아의 문화도시 보릿고개 넘어 세운 생명의 도시 지금 문이 열립니다. 길이 열립니다.

동아시아문화도시청주 명예위원장인 이어령 선생은 9일 열린 개막의 메시지를 이렇게 읊었다. 물질만능과 부패와 오염으로 얼룩진 도시문명을 정화시킬 수 있는 생명도시, 창조도시를 만들고, 천행만복(千幸萬福)을 상징하는 두꺼비 산란지를 주민 힘으로 살려냈듯이 자연과 사람이 하나가 돼 행복도시를 견인하자는 것이다.

또한 청주향교, 서원향약, 명심보감, 태교신기 등 배움과 학문의 도시 이미지를 현대화된 에듀테인먼트로 특성화하고 법고창신의 정신을 담아내며 소로리볍씨, 직지 등의 문화유산과 역사적 가치를 통해 본립도생(本立道生)의 고장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감도 갖고 있다.

이와 함께 사람과 사람,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길을 통해서 아름다운 한국의 매듭, 동심결처럼 생명의 매듭을 만들어가는 도시를 펼쳐나가며, 서로 화하되 따로의 개성을 지닌 화이부동의 꿈을 일구어 글로컬 시대를 선도하자는 것이다. 누가 청주를 항구가 없는 유일한 내륙의 땅이라 했는가. 아니다. 청주 동아시아의 문화도시는 이제 한국인의 그리고 아시아인의 생명의 모항으로 열려있다.

9일에 열린 동아시아문화도시청주 개막식은 어떠했던가. '보릿고개를 넘어 생명도시로'라는 주제가 설명하듯이 한 고개, 한 고개 넘을 때마다 문화의 안식처를 찾고 예술의 꽃을 피우며 시민행복을 노래하지 않았던가. 그리하여 동아시아가 하나되는 대장정의 문을 시민의 이름으로, 시민의 뜨거운 열정으로 열었다.

청주의 청(C,H,E,O,N,G)을 스토리텔링으로 엮고 춤과 노래와 퍼포먼스로 풀어준 것은 역사상 유래가 없는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장애를 딛고 아시안게임 3관왕을 일군 박진호 선수, 꿈을 향해 예쁜 노래를 선사한 안젤로스도미니합창단 어린이들, 국내 유일의 금속활자장 임인호, 그리고 이승훈 청주시장을 비롯해 한중일 문화도시의 대표와 김종덕 문체부장관의 무대 메시지를 통해 우리가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 공감의 장을 만들었다.

어디 이 뿐인가. 청주시립국악단, 무용단, 합창단의 신명나는 한마당 잔치와 김덕수 사무놀이의 길놀이, 시민 가야금 연주단과 패션디자이너 이영희의 '바람의 옷 패션쇼', 그리고 일본과 중국의 멋진 춤사위가 조화를 이루면서 최고의 감동의 무대를 펼칠 수 있었다. 여기에 김평호 감독이 이끄는 '생명의 북 대합주'는 청주의 문화가치를 온 몸으로 품고 '우리 다함께' 세계로, 미래로 달려가는 가슴 벅찬 순간이었다.

이제 보릿고개를 넘어 생명의 도시, 동아시아의 대표 도시, 세계 행복도시를 견인하는 첫발을 내딛었다. 85만 시민의 이름으로 15억 동아시아를 감동시키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고, 지구촌을 온몸으로 품을 수 있도록 함께하면 좋겠다. 바람은 차지만 봄 햇살은 맑다. 만화방창(萬化方暢), 꽃들의 잔치마당에 손잡고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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