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세평] 이종수 청주 흥덕문화의집 관장

"설겅주 넘으면 새별 병승이네 갑윤이네/까치고개 넘어 방앗간, 공동묘지 상엿집 지나 종수 승표네 뒷골/어디론가 더 가면 하늘에서 물고기가 쏟아지는 으싱이 현석이네 으싱이// 뒷동수 널다리 건너 늘게미 웃말 아랫말 태영이 승택이네/ 느름싱이 삿갓논 팥밭 한뼘 비도골/더 가면 되목 늘티 창식이 병조네 딸바위 아들바위 마전사 도장골 흐름밭골/신작로 따라 정문거리 고개 넘어 사당마루, 사당마루 지나 거떠리, 거떠리 너어 거쿠리/ 그 맞은편 사실, 경범이네 택수네, 고개 넘어 시승골 소리 곱던 화순이 그 오바 화석이 글 잘 쓰던 인자네/ 서승솔 산 넘어 쇠실 통석이 치석이네/ 쇠실 지나 더더 가면 가래울 달리기 잘하던 기순이 힘 좋던 종관이"(김사인, 「미루나무 길」에서).

김사인 시인의 시를 읽다가 무장무장 사무쳐서 보은 회인, 회남 일대를 쏘다녔다.

시에는 내가 살던 고향 이름과 사람들이 다 나온다. 무슨 우연일까.

시인이 아주 느린 목소리로 불러내는 고향마을과 고향사람들이 내가 떠나온 고향 같고, 아니 떠나와 산 지 오래된 이곳에서 잊고 지낸 사람들을 떠올리게 하는, 이 조화는 무엇이란 말인가.

단순한 추억만은 아닌 뼈에 사무치는 물음 같기만 하다. '밥은 먹고 다니냐'고 묻는 어머니 말씀 같기도 하고, 친구들은 좀 만나고 사느냐고 물어오는 먼 이국에서 세탁소를 한다는 친구의 말 같기도 한,

대청호로 몇몇 마을이 물에 잠기고 옛 사진만 남은 곳이지만 사실마을 앞 지도에는 아직도 경범이네와 택수네 집이 남아있다.

마을사람들에게 물어 찾아가고 싶은 마음을 눌러 참고 구름에 숨었다는 은운리로 가는 비포장 산길을 잘못 들어 헤매다가 대청호를 휘어감고 있는 산과 물빛을 보고 나서야 알았다.

시인이 불러낸 저 가난한 시절 먹었던 밥과 얼굴반찬들이 왜 사무칠 수밖에 없었는지. 내비게이션이나 지도 아니고는 찾아갈 수 없는 길을 나는 차로 달리며 행정편의상 바꾸어버린 마을 이름들 사이에서 헛되이 떠돌고 있음을.

옛날로 돌아가고자 하는, 어머니 자궁으로 돌아가고 싶은 퇴행이 아니라 그런 이름들 하나, 뼈와 살이 된, 몸을 이룬 저 어머니의 음식과도 같은 삶을 살고 있는지 물어오는데 궁궁을을 변변치 않은 대답만 늘어놓고 있었던 것임을.

처음에는 물빛에 취해 독수리봉에 올라 그 정경을 한눈에 담겠노라고 몇 차례 산비탈을 기어오르기도 했다.

숨이 턱에 걸려 잡목처럼 바스라질 것만 같았다.

나중에 다시 돌아오는 길에 보니 길가에서 훤히 내려다보이는 날망이 있는 것을, 커피 한 잔을 낮술 대신 부어 마시며 바람과 햇볕을 쐬고 있으니 지금은 사라진 골짜기들과 시인이 아주 낮은 목소리로 불러내는 논과 밭, 마을과 사람들, 먼지 자욱하니 당당 먼 미루나무길이 보이는 것 같았다.

마치 시인이 느적느적한 목소리로 옆에 와 길동무가 되어 글 잘 쓰던 인자네를 찾아가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하면 지나친 생각일까.

그렇다. 시에 나오는 길을 그대로 걸어보려면 좀 더 많은 곳을 헤매고 잊혀진 사람들은 만나야 한다. 더 이상 흰소리만이 아닌 것이 되려면 시인의 부름에 내 마음의 지도를 다 걸어야 하는 것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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