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준칼럼] 논설실장·대기자

2002년 11월 어느날 새벽, 2톤트럭이 경부고속도로 '만남의 광장' 지하주차장으로 쏜살같이 들어갔다. 그 트럭안에는 돈다발이 가득담긴 박스 수십개가 실렸다. 당시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이회장 후보측에 전달하기 위한 불법정치자금이었다. 승용차를 타고 접선한 사람은 박스가 아니라 트럭채 받았다. 박스떼기가 아니라 차떼기라는 말이 생긴이유다. 당시 검찰은 한나라당이 대기업으로부터 823억원의 불법자금을 받았다고 밝혔다. 제17대 총선을 4개월 앞둔 2003년 12월 이사건이 드러나면서 한나라당은 쑥대밭이 됐다. 당은 존폐의 기로에 몰렸다. 이때 구원투수로 등장한 인물이 박근혜 대통령이었다. 비상대책위원장으로 당 전면에 등장한 그는 '대선자금 차떼기' 혐의가 확인된 뒤 '당사를 팔아 국고에 귀속시키겠다'며 여의도 공터에 천막당사를 쳤다. 곧이어 열린 총선에서 '차떼기'와 '탄핵역풍'으로 한나라당은 열린우리당에 패했지만 '천막당사 정신'으로 기사회생의 발판을 마련했다.

'천막당사'가 상징하는 원칙주의와 개혁이미지로 박근혜는 10년만에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리고 '비상식의 상식화'라는 말을 꺼내들었다. 국가개조론도 밝혔다. 우리 사회 곳곳에 만연한 비상식적인 행태들을 상식과 기준에 맞도록 되돌리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현실은 '상식의 비상식화'로 변한듯 하다. 차떼기사건 당시 대기업이 선거자금에 보태라고 거액의 불법자금을 준것은 결코 공짜가 아니라는 것은 정치인들이 더 잘알것이다. '정경유착'의 역사는 유구하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는 밀턴 프리드만의 말도 있지만 사업가는 밥값 이상을 요구한다.

"모든 사회생활을 주고받는 관계라고 규정할 때,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주는 것이 앞서야 한다는 점이다. 먼저 주고 나중에 받되 '줄 때는 겸손하게 받을 때는 당당하게' 이것이 내 기브 앤드 테이크의 원칙이다."

고 성완종 전경남기업 회장의 자서전 '새벽 빛'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초등학교 졸업식에도 못간 코흘리게 꼬마가 외삼촌이 쥐어준 10원짜리 지폐 몇장을 들고 무작정 상경해 30여 년만에 11개 계열사에 2조원대의 매출을 올리는 대기업으로 성장하기까지 처세의 노하우는 '기브 앤드 테이크'에 담겨 있다. 혹시라도 그에게 돈을 받은 정치인들이 그의 자서전을 꼼꼼히 읽어봤다면 돈을 받기는 커녕 밥을 먹는것도 꺼려했을 것이다. 준돈을 당당히 요구하겠다는 말에서 결기가 느껴진다. 더구나 그도, 회사도 벼랑끝에 내몰렸다. 박 대통령이 수첩공주라는 말을 듣지만 성 전회장도 보기드믄 '메모광'에 '로비왕'이라는 말도 들었다. 2004년부터 11년간 정관계 고위인사들과 면담날짜와 시간, 장소를 구체적으로 기록한 이른바 '성완종 다이어리'를 남긴것을 보면 틀림없이 어딘가에 '뇌물리스트'도 존재할 가능성이 크다. 만약 있다면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권 전체를 흔들어놓을 뇌관이 될 것이다.

정치엔 돈이 들어간다. 선거는 말할것도 없다. 정치의 고비용구조를 개선하기위해 2004년 오세훈법(정치자금법 개정안)이 발효됐지만 외려 불법정치자금 유혹을 키웠다. 이런 정치판에서 박 대통령은 이상주의자 같다. 언론에 보도된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때 일화다. 박 대통령은 당시 캠프좌장이었던 김무성 대표와 수차례 충돌했다고 한다. 경선자금이 바닥나자 김대표가 박 대통령에게 신당동 자택을 팔라고 권유하자 그는 "제가 왜 돈을 쓰라고 했느냐"고 거절했다는 것이다. 나홀로 깨끗하다고 해서 돈없이 정치하고, 선거를 치를수는 없었을 것이다. 성 전회장같은 기업인이 정치권에서 마당발로 통하는것은 이때문이다. 그가 정치를 통해 추구하는것은 권력을 동원해 회사를 키우거나 부실회사를 지키겠다는 일념이다. 정치인들이 그를 통해 얻고자 하는 이익도 뻔하다. 성 전회장과 정치인들이 만나는 지점에서 부패가 싹트고 비상식의 정치가 파생된다. '부패척결'을 외치며 사정의 칼날을 휘두르던 국무총리가 그의 리스트에 올라 가장 먼저 사정의 대상이 되고 떠밀려 사퇴한것은 쓴웃음을 짓게 만드는 '허무개그'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은 '새벽 빛' 추천사에서 "주어진 한계를 뛰어 넘어, 모든 것이 전무한 상태에서 오늘의 성공을 이끌어낸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한한 희망과 감동을 안겨 준다"고 썼다. 반 총장인들 성공스토리의 씁쓸하고 추한 뒷모습을 알리가 없다. 하물며 국민들이 정치인들의 열길 검은속을 알기는 더 힘들다. 성 전회장과 리스트에 오른 인물들이 정치권의 주역들이다. 남미출장에서 돌아와 내놓을 대통령의 카드가 궁금하다. 국가개조보다 지금 더 절실한 것은 정치인들부터 개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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