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칼럼]오상영 영동대 경영학과 교수

연령이 50대 이상이면 1982년에 있었던 국내 최대의 어음사기 사건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이 사건을 계기로 금융실명제의 논의가 시작되었고, 11년 후인 1993년에 대통령 긴급명령 형식으로 금융실명제는 전격적으로 시행되었다. 이로서 금융기관 거래 시 실명의 사용이 의무화 되면서 금융거래의 투명성이 확보되기 시작했다. 당시 금융실명제 도입에 상당한 우려를 제기한 전문가도 많았지만 결과적으로 잘된 정책이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최근 정치권의 고액권 현금을 이용한 불법 후원금 문제가 터지면서 화폐 개혁에 대한 재논의도 고개를 들고 있다. 5만원의 고액권 발행 이전에도 수억 원의 부정자금이 현금으로 이동된 사례가 많았으므로 고액권 때문에 불법자금 규모가 커진다는 논리가 일반화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작은 박스를 이용하여 수천만 원의 부정자금이 전달되었다는 보도가 이어지면서 고액권 사용의 부정적 측면이 부각되고 있다. 그 외에도 시중에 5만 원의 고액권이 품귀현상을 빚는다는 것과 한국은행으로 되돌아오는 환수율 조차도 50% 미만이라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고액권이 경제 흐름에 긍정적으로 작용한다는 판단을 하긴 어려울 듯하다. 특히 초저금리가 이어지면서 현금의 은행 보관 매력이 떨어지고 있다. 고액권 발행 이전의 논의에서도 수없이 언급된 이야기이지만 점차적으로 고액권의 직접 활용가치는 더욱 낮아 보인다. 더구나 상거래의 자금 결제 방식이 전자적으로 변해가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미래의 패러다임이기도 하다.

33년 전 어음사건에 의해 시작된 금융실명제와 같이 최근 정치권의 불법 후원금 사건을 계기로 화폐 개혁의 강력한 드라이브에 대한 재논의가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또한 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지하경제를 양성화하겠다고 강조하기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불행한 일이지만 디플레이션 우려가 증폭되는 있는 요즘의 경제상황에서는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에 대한 논의가 충분하다고 판단된다. 최근 국내 경제 규모를 표기하는 화폐단위에서 조(兆)를 넘어 경(京) 단위가 자주 등장한다. 한국 화폐를 천 단위로 표기하면 1경은 영(0)이 16개 붙는 숫자로 표현해야 한다. 이미 한국은행 자금순환내역에 1경원이 기술되었고, 증권시장, 파생상품시장에서 경 단위 화폐가 쓰이고 있다고 한다. 이미 10년 이상 노미네이션의 조정에 대한 논의는 충분히 이루어졌으므로 새삼스럽게 예상되는 장단점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다만 2003년 리디노미네이션을 추진했던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가 강조하는 적기(適期)에 대한 것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2014년 6월, 매일경제신문의 보도 자료에 따르면 그는 "지금은 물가상승률이 낮아 인플레이션 우려도 없고, 화폐 교체 비용이 오히려 경기 부양에 효과를 낼 수 있다. 지금이 리디노미네이션의 적기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리디노미네이션은 한 나라의 통용되는 화폐의 액면가를 동일한 비율의 낮은 숫자로 낮추는 것이므로 정치경제적, 사회문화적, 그리고 글로벌적 경제 측면에서 상당한 변화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렇지만 세계경제를 주도해야 할 경제 대국을 꿈꾸는 국가에서 1달러에 1,100원의 환율이 적용되는 화폐를 사용한다는 것은 미래지향적이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경제성도 떨어진다. 외국인들도 생소하다는 '1쿼드릴리언'(1천조 원)이라는 영어 화폐 단위를 사용해야하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지만 주부들이 하루치 시장을 봤을 때 현금 결제를 기준으로 한다면 1,000원짜리 수십장을 내야만 한다. 또한 현재 화폐단위는 600배 이상의 경제규모가 커진 경제 환경에서 50년째 고정되어 사용되고 있다. 단순하게 생각해봐도 부조화를 예상하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국가 정책을 입안 할 때 가장 흔히 사용하는 해외 사례를 보아도 유로, 위완, 루블, 루피 등이 10단위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일본의 엔이 120엔 수준으로 100단위임을 인식해야 한다.

최근 한국은행 총재가 화폐 개혁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밝힌 바 있지만 이미 13년 이상의 논의를 해온 경험과 결과가 있으므로 그러한 지식을 바탕으로 짧은 미래에 추진 할 수밖에 없는 당면 과제를 외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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