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석교사 이야기] 정남호 현도정보고

추운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이 되어, 천지 만물이 봄기운을 받아 힘차게 자란다는 '만화방창(萬化方暢)'의 계절! 하지만 대부분의 교정은 봄기운을 애써 외면한 채 고즈넉하기만 하다. 아니 봄의 소리마저 차단하려는지 창문은 이중으로 굳게 닫혀 있고, 학생들은 익숙함 때문인지 형광등 불빛에 의지한 채 반 쯤 잠긴 눈으로 교실 정면을 응시하며 무엇인가를 열심히 적고 또 적어 나가고 있다. 그리고 언 땅을 겨우 녹여 그들을 기다리던 운동장은 덩그러니 비워져 봄의 기운과 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봄의 소리를 외면하는 학생들! 하지만 그들에게는 눈앞의 봄과 바꿀 수 있는 약속받지는 못했지만 오래전부터 학습된 그들만의 봄이 따로 있다. 수 년 뒤에 보상받고자 하는 그들만의 위대하고 찬란한 봄! 그들은 그 날을 기약하며 눈앞의 봄을 겨울인양 참아내는 것이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 돌아보니 그들이 모르는 또 하나의 사실이 있다. 그것은 수 년 아니 수 십 년이 지나 어른이 돼서도 또 다른 봄을 기약하며 오늘의 봄을 다시 한 번 양보해야 할지 모른다는 사실을….

얼마 전 충북도교육청 지원으로 교육정보화 연수를 받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파라과이 교직원들, 지난 해에 이어 2년 째 본교를 찾아 학생 동아리 '낭랑18세'(본교 빵 만들기와 난타를 함께 하는 동아리)와 함께 빵 만들기와 난타를 체험하는 시간을 가질 기회가 있어 그들에게 궁금했던 것들을 하나 둘 찾아보기로 했다. 우리나라와는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의 낮은 경제 성장과 국민소득 그리고 열악한 교육 여건들, 면적이 넓다는 것 이외 그 어느 것 하나 우리와 견주어 이렇다 할 만 한 것이 없는 나라, 그리고 우리가 겪은 동족상잔의 비극 못지않게 전쟁으로 지도자와 남자 90%를 잃는 아픔까지 있는 나라, 하지만 그들에게 의아할 정도로 궁금했던 그리고 부러웠던 한 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행복한 미소와 여유로움! 그러던 중 눈에 띈 인터넷 기사는 모든 것을 설명해 주기에 충분했다. 미국 여론조사기관 갤럽이 '세계 행복의 날'(3월 20일)에 맞춰 143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서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3년 연속 1위인 나라 파라과이 그리고 그에 비해 우리나라는 지난해 보다 더 떨어진 118위라고 한다. 새로운 사실을 알았을 때 두 눈이 번쩍 뜨이는 느낌 대신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느낌은 뭘까. 손과 발 그리고 입을 동원해 그들을 가르치려 했지만 오히려 그들의 표정 속에서 값진 것을 배울 수 있었던 하루, 소유를 통한 행복이 아니라 만족을 통한 행복이라고 하니 더더욱 부럽기만 하다.

오늘부터라도 미래의 찬란한 봄을 기약하지 말고 눈앞의 봄을 찾아 그 기운을 맘껏 느끼고 즐겨보면 어떨까.

우리에게 목적지를 향해 빨리 달릴 수 있도록 만들어진 고속도로, 아니 오직 목적지만을 향해 달려야 하는 고속도로, 절대 멈출 수 없고 늦추는 것마저도 눈총을 받아야 하는 고속도로, 우리나라가 그리고 우리나라 학교와 학생들이 오늘도 고속도로에 놓여 진 채 끊임없이 달리고 있다. 값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함을 알지만, 아버지 세대 그리고 어제의 학생들을 통해 빠르다는 것을 그리고 앞설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기에 어지간한 용기로는 쉽사리 고속도로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있다. 아니 어쩌면 고속도로에서 내려오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역행한다는 소리를 들어야하기에 가끔씩 나타나는 휴게소를 위안 삼으며 달리고 또 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 용기를 내어 나와 학생들에게 말하고 싶다. 조금은 늦어질 수 있겠지만 산과 들을 따라 굽이굽이 쉬어가면서 국도를 달려보자고. 그리고 미래의 행복을 찾아 애써 달리지만 말고 가끔씩은 이미 곁에 와 있는 행복을 찾아 함께 이야기 하자고.

오늘도 머지않은 이곳 교정에서 봄바람과 햇살 그리고 라일락 향과 학교 화단 가득 피어 있는 영산홍만으로도 파라과이 행복지수 89점을 넘어설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반나절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들과 손짓 몸짓만으로도 웃음을 나누며 교류하고 있는 동아리 학생들은 이미 행복한 봄을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끊임없이 들려오는 학생들의 웃음소리와 그들과 어우러진 북소리가 그 답을 대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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