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준칼럼 논설실장·대기자

20대 초반의 아들이 어느날 자동차를 사겠다고 '선언'했을때 가족들은 농담인줄 알았다. 군대를 막 졸업하고 직장도 없이 알바(아르바이트)로 용돈벌이를 하면서 은행잔고라고는 제대할때 월급 일부를 저축한 100만원뿐인 아이가 아무리 중고차라지만 무슨수로 차를 사겠는가. 처음엔 쓸데없는짓 하지마라며 말렸던 가족들은 제까짓게 무슨 대출을 받을 수 있겠느냐며 콧방귀를 뀌었다. 하지만 철없는 아들은 거금 1천200만원짜리 자동차 키를 흔들며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귀가했다. 깜짝놀란 아빠는 아들을 추궁해 대출해준 캐피탈에 전화했더니 대출에 문제가 없다는 말을 들었다. 이번엔 금융감독원으로 문의했다. "캐피탈 사규에 대출해 줄수 있다면 가능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친구네집 얘기다. 그 친구는 "대한민국은 청년 신용불량자를 양산하는 나라"라며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캐피탈측은 친구아들에게 "대출받아 돈만 잘갚으면 오히려 신용등급이 높아져 사회생활에 유리하니 대출을 최대한 받으라"고 유혹했다고 한다.

'돈 장사꾼'들에게 윤리의식을 요구하고 싶지는 않다. 이익추구를 위해서는 '영혼'이라도 빼앗으려는 것이 그들의 생리다. 셰익스피어 소설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샤일록은 돈을 갚지 않자 안토니오의 살점까지 베어가려고 했다. 돈을 빌려줄때는 천사의 얼굴을 하고 접근하다가 제 때 못갚으면 '악마'로 돌변하는 사례는 흔하다. 제2금융권에서는 청년들만큼 만만한 호갱(호구고객)이 없다. 돈은 절실하지만 가진것이 없는 청년들은 높은 금리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모아놓은 재산이 있고 비교적 생활기반이 안정된 40대 이상은 굳이 이자가 비싼 제 2금융권을 거래할 필요를 못느낀다.

지난해 통계청의 가계금융·복지조사는 이러한 현실을 반영한다. 30세 미만 가구주 부채는 1천558만원으로 전년 1천401만원에 비해 11.2% 늘어났다. 30대 가구주 부채도 4천890만원에서 5천235만원으로 7.0% 높아졌다. 40대(6천824만원), 50대(7천911만원) 부채는 오히려 전년보다 0.8%와 0.6% 감소한 것을 감안하면 전체 연령대에서 청년 부채 증가율이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있다.

물론 청년부채의 원인은 다양하다. '청년실신시대'라는 신조어가 말해주듯 대학때 학자금 대출을 받아 졸업했으나 취업을 못해 실업자가 되는 동시에 신용불량자로 전락하거나 취업준비과정에서 돈이 필요해 빚을 지는 사례도 있을것이다. 친구 아들처럼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능력도 안되면서 대출받는 경우는 더 많다. 이는 자신에게 귀책사유가 있다.

하지만 우리사회가 빚을 부추기는 측면이 있다. 거의 융단폭격식으로 등장하는 제2금융권의 TV 광고를 보면 마치 자판기에서 커피뽑는것 만큼 돈을 쉽게 빌릴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예 대부업체가 청년들의 고민을 간단히 해소하고 돈을 빌리는 주부들에게 행복을 안겨주는듯한 왜곡된 메시지를 담은 광고가 끊임없이 반복된다. 사리분별력이 떨어지는 청소년들이 이런 광고에 익숙해지면 당연히 돈을 우습게 알지도 모른다. 최고 연리 34.9%가 넘는 살인적인 고금리의 폐해는 철저히 감춰져 있다. 체험학습처럼 직접 당해봐야 남의 돈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체감할 것이다. 그렇다고 금융당국이 소비자편이라고 볼 수도 없다. 제도적으로도 그렇다. 시급 7~8천원 받는 알바생에게도 천만원이 넘는 대출이 이뤄지는 사회를 정상이라고 볼 수 있을까. 청년신용불량자가 증가하지 않는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그런데도 금융감독원은 "여기에 묻지말고 캐피탈에게 물어봐라"는 식으로 대수롭지 않게 대응하고 있다.

1980년대 미국은 경영난에 처한 은행들이 '부모가 동의해야 한다'는 내부규정을 슬며시 없앤뒤 무일푼인 대학생들에게 마구잡이식으로 카드를 발급했다. 그 탓에 평생 '비자카드'로 '마스터카드'빚을 돌려막는 삶에 길들여진 미국인들은 요즘 곤경에 빠졌다. 연체율이 치솟고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최근 반짝경기 회복을 즐기고 있지만 '카드대란'이 터지면 제 2 금융위기의 쓰나미가 몰려올지도 모른다. 오바마 정부가 카드업계의 고삐를 쥐고 있는 이유다.

대한민국은 빚을 조장하는 나라다. 저금리와 대출규제 완화로 은행 가계대출은 579조로 사상최고치를 경신했다. 지난 4월 한달간에만 8조5천억원의 가계빚이 쌓였다. 부동산경기를 살리기 위해 초저리로 내놓은 '안심전환대출'은 정부가 깜짝 놀랄만큼 불티나게 나갔다. 모든 사람들이 오로지 내집마련을 위해 대출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한다면 착각일 수도 있다. 이런 사회분위기에서 청년들이 빚에 둔감할 수 밖에 없다. 철학자 에머슨은 "빚을 지는것은 노예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급증하는 청년신용불량자에 대한 책임은 금융당국도 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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