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가 된 고향 … 이제 추억 대신 '삶'을 낚는다
호수가 된 고향 … 이제 추억 대신 '삶'을 낚는다
  • 중부매일
  • 승인 2015.05.25 21:5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내륙의 어부를 찾아서 <2> 제천 청풍호의 어부들
금어기를 앞 둔 4월의 어느 날 청풍호의 적막을 깨고 베테랑 어부 정명헌·송금용 부부가 출어에 나섰다. 남편과 30여년의 세월 간 배를 탄 부인은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미소를 지었고 남편은 청풍호를 내려쬐는 따가운 햇살을 피하지도 않은 채 시종일관 굳은 표정으로 배를 몬다.

충주댐이 만들어지면서 당시 제원군 5개면 61개리, 3천300가구의 주민 1만8천700명이 집단 이주를 했다. 청풍과 한수면 등 2개면은 면소재지까지 다른 곳으로 옮겼고, 청풍면의 경우 27개 마을 가운데 25개나 되는 마을이 물 밑에 가라앉았다. 충주댐 건설로 가장 많이 수몰된 지역이 당시 제원군, 지금의 제천이었다. 1985년 충주댐의 물이 다 차오르자, 주민들은 물에 잠긴 옛 고향 마을에 고기잡이배를 띄웠다. / 편집자

수몰로 인해 마을 전체가 산 중턱으로 이주한 금성면 성내리 주민들은 마을회관 주변에 옛 고향 사진을 붙여 놓고 실향에 대한 아쉬움을 달랬다.

농업이 주를 이루던 마을에 어부라는 새로운 직업이 생겨난 것은 댐 건설 이후. 추억이 서린 호수에서 고기를 잡는 그들은 생계를 의지하고 있는 삶의 터전을 '청풍호'라 명명했다.

가장 많은 세대가 수몰된 제천지역 주민들은 충주호를 청풍호로 바꿔달라며 2007년 이름 찾기 운동을 펼쳤다. 충주시는 인공호수의 명칭은 댐의 명칭을 따르는 것이 원칙이라며 기존 입장을 고수했고, 제천지역 주민들의 염원은 결국 불발됐다.

하지만 제천 주민들은 멈추지 않았다. 제천시는 지역 내 도로안내 표지판의 충주호 표기를 모두 청풍호로 바꿨다. 충주호가 제천에서 만큼은 청풍호로 불리는 배경이다.

그물을 쳐 놓은 '포인트'에 도착한 '명헌호'에서 행복한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그물에 걸려 올라오는 쏘가리 떼를 본 신명임씨가 "오늘 풍년이네"라며 취재진에게 포즈를 취하고 있다.

# 고기잡이배를 타는 부부

"우리는 두 내우씩 짝을 지어 작업을 합니다. 남편들이 그물을 걷어 올리면, 여자들은 고기를 따고 엉킨 그물을 풀어서 사리죠."

정명헌(59)씨는 제천지역 어부들의 특징을 이렇게 설명했다. 어업권은 남편에게 있을 수도, 아내에게 있는 경우도 있었는데 대부분 부부가 함께 공동작업을 했다. 함께 배를 타다보니 아내가 어업권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한국자율관리어업연합회 충북도지회에서 여성 어부들이 가장 많은 곳 또한 제천이다. 정씨는 대 여섯 명은 족히 될 거라고 귀띔했다.

제천에서는 1985년 댐이 조성된 후 어업활동이 시작됐다. 수산공동체(모범·13명), 금수공동체(협동·21명), 청풍공동체(협동·27명), 한수공동체(모범·24명) 등 면단위로 운영하는 어업공동체를 중심으로 85명이 활동하고 있다.

제천어부들의 대표를 맡고 있는 금수공동체 정명헌 지부장의 어업 구역은 금성면 석내리에서 황석리까지. 이 구역은 청풍호 중에서도 풍경이 가장 빼어난 곳으로 유명하다. 금성면 소재지에서 시작되는 532번 지방도는 황석리-후산리-부산리를 거쳐 충주 동량면으로 이어진다.

정명헌씨를 따라 배를 탄 것은 지난 4월 말이었는데, 5월부터 6월까지 금어기(고기들의 산란철)를 앞두고 분주해 보였다. 아침 7시, 그물을 올리기엔 다소 늦은 시간, 성내리 마을회관 앞에서 정씨 부부를 만났다. 새벽안개가 걷히기 전, 선착장을 떠난 고기잡이 배 '명헌호'는 청풍호 어느 곳에 세워도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했다. 정씨 부부가 사용하는 고기잡이 그물은 자망. 층을 내 켜켜이 쌓아올린 듯 한 바위 근처에서 그물을 건져 올리니 쏘가리, 붕어, 메기 등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청풍호의 부부 어부들은 나름의 작업방식을 가지고 있다. 남편이 그물을 걷어 올리면 부인이 쪼그려 앉아 그물을 풀고 생선을 고른다. 그새 남편은 배를 몰아 다음 장소로 이동한다.

"어머~ 어쩐 일이래. 평소 잡히지도 않던 고기들이 오늘은 풍년이네"

정씨 아내 송금용(57)씨 얼굴이 활짝 피었다. 보통 그물은 해거름에 내렸다 새벽 5시쯤 올리는데 수온이 올라서인지 그날따라 고기가 많이 잡혔다. 정씨 부부의 직업은 어부, 농부, 식당 주인. KBS 드라마 촬영장 앞에서 15년간 식당을 운영했지만 관람객 수가 급격히 줄어들고, 촬영장까지 폐쇄하면서 영업을 중단했다.

"고기만 잡아서는 먹고 살지 못해요. 우리는 오이·수박 농사도 짓고 있습니다."

농사도 짓고 고기도 잡지만 어업은 신통치 않다. 그물을 던지고 고무배까지 타며 낚시하는 사람들은 단속망을 잘도 피해갔다. 주말이면 수상레저를 즐기는 관광객들, 낚시꾼들, 성내리 인근 작성산과 동산을 찾는 등산객들로 사람들이 북적이지만 모두 스쳐 지나는 인파들일 뿐, 주민들에게 큰 도움은 되지 못하고 있다.

청풍호에서 주로 잡히는 어종은 쏘가리와 뱀장어, 잉어, 붕어, 메기 등. 직판장이 없어 중간 매매상인을 통해 모두 식당으로 팔려나간다. 쏘가리는 4·9·10월, 장어는 장마철인 7·8월에 많이 잡힌다.

# '영복호' 여성 선주 신명임씨

고기잡이 배의 이름은 보통 선주의 이름을 따른다. 금성면 성내리 선착장에 정박한 현욱호, 영복호, 명헌호 역시 배를 모는 주인장 이름을 따서 붙였다.

영복호는 정명헌씨와 동갑내기인 노영복씨네 고기잡이 배 이름. 주인장이 병원 치료를 받게 되면서 2년 전 아내 신명임(54)씨가 어업권을 넘겨받았다. 마을 부녀회장을 맡고 있는 신명임씨네 부부는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어부다. 제일 먼저 배에 올랐고, 오로지 고기만 잡고 살았다.

"고기 잡은 지 벌써 30년이 지났네요. 우리 부부는 농사도 짓지 않고 배만 탔습니다. 큰 아이가 서른 한 살인데 갓난아기일 때부터 업고 허리와 배에 끈을 매달고 고기를 잡았죠. 그렇게 두 아이를 키웠습니다."

어부 부모를 둔 이유로, 큰 아들 길성씨와 작은 아들 길용씨는 배 위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한 번은 둘째를 태운 배가 바람에 떠내려간 적이 있었는데 모성의 힘은 놀라웠다.

"큰 아이가 작은 애를 태워준다고 배를 띄우려다 바람이 불어서 100m 정도 떠내려 간 일이 있었어요. 눈에 보이는 것이 없더라고요. 수영을 잘 하지도 못했지만 물 수위는 대충 아니까 빠져 죽지는 않겠구나 싶어서 뛰어들었죠. 큰 소리로 아이를 안심시키고, 배까지 헤엄을 쳐서 올라탔습니다. 엄마·아빠가 강에서 살다시피 하니까 아이들도 밥만 먹으면 강으로 달려가더라고요. 지금도 둘째는 아빠가 힘들다고 하면 대신 배를 타러 나갑니다."

장성한 큰 아들은 연구원이 돼 결혼 후 손주를 안겼고, 둘째는 대학 졸업 후 경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늠름한 청년이 됐다.

1985년 4월 결혼할 때까지만 해도 신명임씨는 불과 몇 달 후 자신이 어부의 아내가 될 거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그해 가을, 마을에 물이 차오르기 시작하자 남편은 그물과 배를 받고 어부가 됐다.

한 시간 남짓한 동행취재를 마친 부부가 취재진을 선착장에 내려주고 작별인사를 하고 있다. 부부는 그렇게 한 칸 남짓한 나룻배에 몸을 싣고 다시 청풍호를 향한다.

신명임씨 부부가 사용하는 그물은 각망. 뱀장어, 잉어, 붕어, 쏘가리, 메기를 비롯해 참게도 잡힌다. 노를 저어야 했던 옛 나무배를 생각하면 세상 참 좋아졌지만 어구가 발달한 만큼 어획량은 대폭 줄었다. '짊어지고도 못 올 만큼 많았던' 물고기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가물어 물 빠진 선착장이건만, 30년 전 제천으로 시집온 서울댁은 제천 아낙이 다 되어, 특유의 실팍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만선을 자신했다.

/ 기획취재팀



남편 노영복씨의 건강악화로 2년 전 어업권을 물려받은 신명임씨가 선착장에 정박한 '영복호'에서 과거 추억을 회상하며 미소를 짓고 있다.

뽕나무밭은 푸른 바다로 변했다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로 변한다는 뜻의 '상전벽해'는 청풍면의 어제와 오늘을 설명하는 매우 적절한 비유 가운데 하나다.

충북에서도 제원군은 임야가 전체 면적의 77%에 달했는데 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청원·괴산·중원군과 함께 충북 전체 누에고치 생산량의 절반을 차지했다. 제원군은 한해 30만㎏의 누에고치를 생산했고, 금성면에 있던 남한흥산 제천 생산 공장에서는 한 해 84t가량의 명주실을 뽑아 수출했다. 남한흥산은 1981년 충북제사가 영업권을 인수하기 전까지, 송학면의 아세아 시멘트 공장과 더불어 제원군의 대표 수출 기간 산업체로 꼽혔다. 하지만 1985년 충주댐이 건설되면서 제원군의 뽕나무 밭은 그야말로 '푸른 바다'로 변했다. / 기획취재팀

※ 참고: 한국의 발견-충청북도, 뿌리깊은나무



▶기획취재팀= 김정미 팀장, 박재광, 신동빈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취재했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