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준 칼럼] 논설실장·대기자

난 아직도 학창시절 도시락에 관한 '트라우마'를 떨치지 못한다. 청주의 모 사립 중학교를 다니던 나는 도시락때문에 큰 상처를 받았다. 1교시 수업을 하는 도중 교장이 직접 도시락 검사에 나섰다. 그날따라 급히 등교하느라 도시락을 챙기지 못한 나는 교장의 호통에 얼굴이 홍당무가 된채 집으로 되돌아가 밥과 김치를 담은 도시락을 들고 그 먼길을 뛰어와 교장실에서 검사를 받았다. 김칫국물로 엉망이된 도시락을 본 교장의 비수같은 말은 차마 공개하고 싶지 않다.

중년층 이상은 누구나 도시락에 대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겨울이면 석탄난로 위에 양은 도시락을 올려놓았던 따스한 정경도 떠오른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간식으로 나누어 주었던 옥수수빵의 깔깔하지만 고소한 식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과연 그 빵을 지금도 맛있게 먹을 수 있을까.

당시엔 점심을 학교에서 공짜로 준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의 한 장면처럼 가난한 집안형편 때문에 수업료를 제때 못낸 학생을 교단으로 불러 교장에게 지적당했다며 마구 구타하는 교사도 봤다. 그런 시대에 돈 한 푼 안내고 학교에서 점심을 먹을 수 있는 나라는 공산주의국가이거나 북유럽 같은 복지선진국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무상급식은 이제 시대의 담론이 됐다. 도입된 지 불과 5년밖에 안됐지만 무상급식을 하는 지자체보다 무상급식을 하지 않는 지자체가 뉴스로 다뤄질만큼 빠르게 정착됐다.

지난 2009년 경기도교육감선거에서 당시 진보성향의 김상곤 후보가 초·중학생 무상급식을 공약으로 내세워 당선된 이후 2010년 지방선거에서는 진보진영은 물론 보수진영 교육감 후보들도 무상급식을 앞다퉈 공약으로 내세웠다.

그 중에서도 충북은 전국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폭넓게 무상급식을 실시한 곳이다. 충북이 무상급식의 '모범도'가 된 것은 지방자치단체의 예산분담이 크게 기여했다. 충북교육청의 예산만으로 초·중학생 전체 무상급식을 감당하기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무상급식은 학부모들에게 큰 호응을 받았다. 표를 먹고 사는 정치인들에겐 매우 매력적인 공약이다. 유권자들의 공짜심리를 파고 들었다는 말도 있지만 무상급식은 긍정적인 효과도 많다. 의무교육의 무상범위를 확대했고 낙인효과를 줄였으며 학부모의 가계부담을 어느정도 경감시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무상급식은 국민적 욕구가 쌓이고 사회적인 공감대를 형성한 다음에 실시한 복지는 아니었다. 유권자들이 원했다기보다는 정치권에서 복지욕구를 창출한 측면이 강하다. 표 때문이다. 시행된지 5년여만에 재정부담으로 논란을 빚고 있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충북도 마찬가지다. 한정된 복지예산 때문에 늘 예산난에 허덕이는 도와 교육청이 무상급식 문제로 갈등을 겪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양 기관장의 이념적 성향이 달라서도 아니다. 복지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현실에서 재정 부담요인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무상급식은 정작 복지혜택이 절실한 계층에 대한 복지가 오히려 줄어드는 '보편적 복지의 역설'이 나타나고 있다.

무상급식으로 인해 광역자치단체와 교육청이 갈등을 빚는 것은 타지역도 마찬가지다. 홍준표 경남도지사는 아예 무상급식 중단을 선언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이 지사는 경향신문 칼럼에서 "무상급식은 의무급식이다. 이는 국가 책임이고 여야의 공동 책임이다. 우리 모두 아이들이 점심 한 끼 눈치보지 않고 맘껏 먹을 수 있게 아량을 베풀길 바란다"고 밝힌 바 있다. 난 이 지사의 진정성을 믿는다. 그는 지사 후보시절에도 무상급식을 넘어 초·중·특수학교 무상급식에 친환경농산물이 쓰이도록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는 말도 했다. 김 교육감도 마치 이 지사와 입을 맞춘것처럼 "현행 초·중·특수학교 무상급식을 넘어 친환경 무상급식을 확대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들의 이같은 공약을 도민들이 흘려들었을 리 없다. 적어도 자녀가 초·중·특수학교에 다니는 학부형들은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그런 그들이 막상 무상급식 예산분담을 놓고 담당간부들을 앞세워 한치의 양보도 없이 서로 삿대질하며 날선 공방을 벌이고 있다. 보기 민망할 정도다.

둘이 만나 담판을 지으라는 언론과 시민단체의 열화같은 호소에도 귀를 막고 있다. 그러면서도 얼마전 열린 세계유기농엑스포 성공 개최를 위한 업무 협약식에서 둘은 시종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덕담을 나눠 주위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무상급식이 물건너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가장 책임있는 사람들이 속내를 감추고 이중플레이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이 지사와 김 교육감의 진심은 과연 무엇일까. 그들의 깊은 속내를 알기엔 도민들은 너무 순진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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