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변광섭 동아시아문화도시 사무국장

서둘러 숲 속으로 달려갔다. 번잡한 일상과 후끈거리는 도시의 열기를 피하기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점차 사그라드는 열정을 충전하고 싶은 요량이었다.

자연은 언제나 원시의 생명력을 간직하고 있다. 나는 그 속에서 언뜻언뜻 보이는 초록의 신비를 건져 올리고, 그 생명력이 주는 붉은 열정을 가슴에 품는다. 태곳적부터 켜켜이 쌓아 온 깊은 숨소리를 들으면 내 안의 세포가 두근거리고 피가 맑아지며 명료해진다.

자연은 어느 것 하나 한 번에 생긴 것이 없고, 욕망으로 얼룩진 모습 또한 발견할 수 없다. 세월이 흘러간 시간만큼의 노력이 빚어낸 산물이며 그 속에서 겪은 숱한 상처와 아픔의 성찬이기에 더욱 오달진 것이다. 고단한 몸이 자연의 뜨거운 숨결을 오롯이 느끼는 순간, 진득한 피로는 물러가고 존재의 이유가 온 몸으로 밀려온다.

사람과의 만남 속에서도 경외감과 부러움을 느끼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한 분야에서 최고의 가치를 인정받는 사람이거나 내가 꿈꿔왔던 것들을 누군가를 통해 엿볼 수 있을 때 말이다.

이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열정과 영감, 그리고 오랜 시간 역경에 단련된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한 일(一)자를 10년 동안 쓰면 붓끝에서 강물이 흐른다고 하지 않았던가. 동아시아문화도시청주는 12명의 시민 이야기를 특별전을 통해 소개하고 있다.

벌랏 한지마을의 이종국씨는 직접 닥나무를 재배하고 전통의 기법 그대로 한지를 만들며 다양한 문화상품과 예술의 영역으로 확장하고 있다. 지천년견오백이라고 했는데, 생활미학으로 새롭게 탄생시켰으니 그의 삶에 향기가 끼쳐온다. 옻칠명장 김성호씨는 99번의 옻칠과 100번째 장인의 열정을 담아 최고의 옻칠가구를 탄생시키고 있다. 여기에 자개까지 입히니 그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어찌 글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한 평생 붓을 만드는 일에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온 유필무씨는 태모필에서부터 초필, 양모필, 황모필 등 수많은 종류의 붓을 만들어 오고 있다. 초필은 손으로 1만5천번을 두드려야 붓의 총이 만들어지는 고단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한 자루 완성하려면 3개월이나 걸린다. 고난과 역경을 딛지 않고서는 위대한 예술이 탄생될 수 없음을 웅변하고 있다.

조병묵씨는 대한민국 최고의 솟대를 만들고 있다. 하늘을 향한 인간의 염원을 담고 있는 솟대가 옻칠과 금속 등의 다양한 기법으로 새 단장 했으니 이보다 더 고귀할 수는 없다.

강전섭씨는 이 지역 최고의 고서 수집가다. 소년 창간호를 비롯해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한용운의 '님의 침묵', 최남선의 '백팔번뇌', 유길준의 '서유견문' 등 희귀본과 딱지본, 그리고 옛 교과서를 소장하고 있다. 유훈종씨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귀한 옹기를 400여 점 소장하고 있다. 선조들의 삶과 문화를 엿보고 발효과학의 신비를 만날 수 있는 옹기 곁에 있으며 나도 절로 순박한 사람으로 돌아간다.

정영권씨는 우리 지역 유일의 갈대 호드기(피리)를 만들고 직접 연주하는 사람이다. 무심천 까치내의 갈대를 쇠죽에 끓여 말리기를 여러 번 반복한 뒤 다양한 종류의 호드기를 만들고 직접 연주까지 하는데 그 풍류는 아련한 옛추억에 젖게 한다. 무형문화재 신선주의 전수자인 박준미씨는 절멸위기에 처한 전통주를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 어려움이야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애비가 그랬던 것처럼 엄선된 약초만을 사용해 신선이 마시는 최고의 술을 빚고 있다.

옹기스피커 제작자 박용수씨는 최고의 소리를 만드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옹기, 종이, 3D프린터, 오크통 등 다양한 재료를 활용해 스피커를 만들면서 문화와 기술이 융합하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고 있다.

건축가 류흥렬씨는 조선시대의 고가구를 컬렉션 하면서 우리 문화의 소중함을 품고 있으며, 지원스님은 수많은 종류의 다완과 향도를 세상 사람들을 위해 선보였으며, 도예가 김만수씨는 토우시리즈를 통해 생명의 가치를 노래했다. 시민들의 진한 땀방울과 열정, 빛나는 장인정신 속에서 청주정신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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