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설거지를 하는데 생일이란 말이 떠오른다. 뒤이어 환청처럼 친정엄마 목소리가 들린다. "미역국 끓여 먹었니?" 그 말을 들을 때는 생일이 훌쩍 지난 후다. 그래도 엄마는 잊지 않고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미역국 끓여 먹었니? 경우에 따라서 미역국은 자주 식탁에 오르는 국 종류의 하나 일 수 있으나 엄마에게 미역국은 내 생일을 그냥 지나친 게으름을 꾸짖는 것이기도 하고, 미역국을 끓여주지 못한 미안함과 그날 산고의 고통이 함께 와 닿는 말일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챙겨주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엄마의 마음이다.

지금은 칠월이다. 내 생일은 섣달그믐이다. 올해 생일이 반쯤 지났고 다음 생일을 기다리는 기간도 반 정도 된다. 그러나 내년 생일에는 "미역국 끓여 먹었니?" 묻던 엄마 말을 들을 수 없다.

아픈 기억 속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엄마와 마지막은 유월 끈끈하던 그 하루에 묶여 있다. 오랜 가뭄으로 타들어 가는 대지보다, 메르스의 공포보다 더 무서운 것은 영원한 이별이다. 맛있는 것같이 먹을 수 없고, 좋은 것을 함께 볼 수 없으며 같이 호흡할 수 없는 거리. 구십육 년 엄마의 삶을 정리하는 사흘은 짧고도 길었다.

강물로 흘러가고 싶은 엄마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소나무 곁 수목장으로 모셨다. 한 그루 나무에 두 줄 원으로 유해가 묻히고 위치에는 각각 고유번호를 준다. 그곳에서 엄마는 탄생으로 얻은 주민등록 번호는 사라지고 사후에 얻은 번호가 이름을 대신할 것이다.

엄마 번호 곁에는 여러 사람의 번호가 있다. 땅속 깊숙이에서 만나는 또 다른 이웃들이다. 마치 옹기종이 모여 있는 마을 같다. 엄마는 휴식의 마을로 이사를 했다. 평소 말이 없고 남의 말을 잘 들어주었으니 좋은 이웃이 되어 줄 것이다.

떡을 돌리며 이사 온 것을 알리듯 나는 엄마 이웃에게 씀바귀 꽃잎을 뿌려 주었다. 우리 엄마는 소리를 잘 듣지 못해요, 목소리를 크게 해주세요. 나이가 제일 많다고 따돌리지 말고 같이 놀아주세요. 우리 엄마가 왕언니네요. 키는 작지만 미인이에요. 형제들이 엄마를 소개한다.

산세도 좋고 햇빛도 잘 들어서 그동안 젖은 마음이 마르는 것 같았다. 새소리도 가깝다. 맑은소리를 들으니 장지에 온 것이 아니라 경치 좋은 곳에 여행 온 듯한 착각이 든다. 오랜만에 가족과 친척이 함께 시간을 보낸 것도 엄마가 준 마지막 선물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 엄마, 이젠 대답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불러보고 귀 기울여본다. 그 순간은 나뭇잎의 미세한 흔들림도 날아온 나비도 엄마가 알리는 몸짓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엄마와 다르게 나는 올해 새로운 번호를 얻었다. 엄마 번호는 변화하지 않는 땅의 번호라면, 나는 일구고 가꾸어야 하는 생명의 땅이다. 청주시 농업기술센터에서 진행하는 '도시민 텃밭 가꾸기'에 신청했고 여섯 평 땅을 분양받았다.

26번 밭의 주인인 나는 욕심이 많다. 오래전부터 꿈꾸어 오던 텃밭에 대한 열망을 고스란히 쏟았다. 고추 열 포기, 가지, 토마토, 땅콩을 심고도 상추며 쑥갓, 아욱, 근대, 열무까지 잔뜩 뿌려 놓으니 흙이 보이지 않는다. 더군다나 텃밭에 대한 정보는 팔랑귀여서 뒤늦게 마디호박과 단호박도 심었다.

지금 단호박 줄기가 힘차게 뻗어 이웃 밭까지 넘어갔다. 줄기 끝을 다시 우리 밭쪽으로 돌려놓기를 여러 번이다. 꽃도 피지 않고 잎만 무성하여 주변의 농작물을 덮는다. 웃자란 줄기를 잘라 줘야지 하면서도 망설이는데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것을 볼 때면 내 몸에서도 힘이 솟는다.

저물녘 텃밭에 앉아 있으면 아직 남은 해의 기운과 함께 곡식들의 냄새는 지친 마음을 토닥여 준다. 오묘한 자연의 냄새는 취할수록 고소하다.

요즈음은 밭에 갈 때마다 들뜬다. 실하게 자라는 곡식을 보면 흐뭇하다. 비닐을 씌우던 날, 거센 봄바람에 휩쓸리던 참담함도 추억이 된다.

씨를 어디에 뿌려야 하는지 몰라서 이랑을 깊게 만들고는 두둑에 뿌렸다. 황무지 같던 밭에서 씨앗이 돋았다. 다른 밭들은 모두 낮은 이랑에서 싹이 나는데 우리만 두둑에서 엉겨 붙듯 다복이 나왔다. 성장에 좋은 일정한 거리는 만들어 주지 못했다. 뽑는 것조차 아까워 바라보고 또 바라보며 즐거웠다.

이웃 밭 아저씨가 먼저 다가왔다. 텃밭 농사 3년째인 그는 자기도 처음에 이웃에게 배웠다며 다시 나눠 줄 수 있어 기쁘다고 했다. 능숙한 그의 손으로 밭다운 형태로 곡식이 제자리를 잡았다. 밭에 가면 그가 오기를 기다린다. 새로운 정보도 얻고 곡식 가꾸는 이야기를 나누는 좋은 이웃이다. 거름주기, 땅콩 흙 돋구기, 가지치기도 그에게서 배웠다.

고추밭에 진딧물이 생겼다. 유기농으로 키우고 싶었는데 갈등이 생긴다. 이웃들이 정보를 준다. 주방세제를 희석해서 뿌리라고 하는가 하면 식초, 설탕물도 좋다고 한다. 진딧물은 다른 밭에도 옮길 수 있어서 모두 내 일처럼 걱정이다. 텃밭을 통해서 또 다른 이웃을 만난 것은 농사짓는 이상으로 값진 수확이다.

지금 텃밭은 윤기가 흐른다. 밭 앞에 꽂은 번호의 푯말이 자라난 곡식으로 조금씩 묻힌다. 누가 더 잘 키웠나 밭을 살피는 시간을 즐긴다. 밭은 주인의 성격이 보인다. 취향도 알 수 있다. 곡식은 주인의 발걸음 소리로 자란다는 말처럼 정성도 느낀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누군가도 내 밭을 보고 있을지 모른다. 그는 이웃 밭까지 뻗은 단호박 줄기를 따라가지 말고, 진노랑 땅콩꽃을 보려고 키를 낮출 줄 아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쑥갓꽃이 별처럼 흔들려도 오지 못했던 뜨거운 유월도 기억하리.



약력

▶'창조문학'으로 등단

▶청주예총, 예술공로상 수상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창작지원금 수혜

▶충북수필문학상 수상, 허균 문학상 수상

▶수필집 '뒤로 걷는 여자', '꼬리로 말하다'

▶여백문학회 회장 역임, 청주문인협회, 충북수필문학회, 비존재 회원

▶이메일 jojo487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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