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작고한 코메디의 황제, 이주일씨는 남을 웃기는 일이 그렇게 힘들다고 생전에 고백했다. 챨리 채플린의 말처럼 그도 남을 한번 웃기기 위해 열번은 몸으로 울었으리라.
 웃음의 미학이란 이처럼 인생의 통찰과 오랜 경륜, 그리고 수없는 내출혈 속에 피어나는 꽃이다. 「숲속의 노래」라는 주제아래 지난 28일부터 9월4일까지 청주 예술의 전당 전시실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는 이홍원씨도 그런 입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씨의 그림은 우선 보아서 즐겁고 웃음이 절로 나온다. 우습다고 해서 작품의 질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그는 탄탄한 구성력과 일정 궤도에 오른 필력을 바탕으로 질박한 회화(繪畵)속의 회화(會話)를 창출해 낸다.
 아니, 그림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만화아닌가? 얼핏 이런 착각도 들겠지만 그림의 1차적속성은 어디까지나 그림 자체다. 탄탄한 그림의 완성도아래 무수히 쏟아내는 대화는 그의 작품 밑그림에 슬쩍 숨겨놓은 작의(作意)를 발견해야 비로소 웃음의 참맛을 건져낼 수 있다.
 어떤 작품에서는 어렵지 않게 작품의 해학성, 풍자성을 읽어 내릴 수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맛뵈기이지 이씨 작품의 본령(本領)은 아니다.
 숲속의 노래중 4쪽으로 구성된 「산신령과 선녀」는 흔히 알고 있는 「선녀와 나뭇꾼」설화를 패러디한 작품이다. 선녀가 벽계수에서 목욕을 하는데 속옷을 잃어버렸다. 신선이 선녀의 속옷(팬티)을 들고 선녀에게 물었다. 『신선: (금으로 된 속옷을 보이며) 이 금 거시기가 네것이냐? 선녀:노오~ , 신선:그러면 이 은(銀) 거시기가 네것이냐? 선녀:노오~, 신선: (헝겊 속옷을 보이며) 그럼 이 헝겊 거시기가 네것이냐? 선녀: 야쓰(예쓰), 신선: 어휴 냄새야 좀 빨아 입어라, 선녀:(실망하고 화가 나서) 에이 ××...
 이 질탕한 그림과 다이얼로그는 외설스럽다는 생각이 도무지 들지 않고 관람객으로 하여금 배꼽을 움켜쥐게 만든다. 건강한 에로티시즘이자 물질만능 풍조를 그만의 화법으로 통렬히 꼬집는다. 이외에도 신혼여행 시리즈가 있지만 그 진 맛을 알려면 직접 보시길...
 그의 이야기는 고고한 선비나 귀족들의 이야기가 아니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이다. 소나기 시리즈를 보면 흙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농민들의 애환이 웃음으로 승화된다. 꼴짐은 넘어가고 새참을 내가는 아낙은 자빠지고 아이들은 물 태배기를 치는데 원두막 밑에 있는 강아지는 아무 것도 모르고 꼬리를 살래 살래 흔든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유년 시절에 겪었던 이야기들이다. 질박하고 또 절박했던 그 이야기가, 게릴라성 호우가 툭하면 내리 덮치는 요즈음에 돌연 그리움으로, 웃음으로 정감있게 다가서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긴박했던 상황의 논리를 슬며시 해학과 웃음으로 바꾸어 놓는 그만의 역설적 화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흥선대원군이 야인시절, 남녀의 성기를 대구(對句)로 하여 난초를 친 작품이 전해지는데 이홍원씨의 장군바위와 폭포수를 보면 영낙없는 성기의 대구(對句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이홍원씨의 작품 진면목은 1회적 해학성에 있는게 아니라 숲의 이야기를 그만의 두툼한 필법으로 풀어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2160호에 이르는 초대형 작품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담겨있고 철철이 변하는 계절의 틈바구니서 섭생하는 동식물들이 화폭을 빼곡히 메운다. 공간은 그대로이되 시간은 변한다. 불변성의 공간과 가변성의 시간 속에 수많은 삶의 기록표를 작성하는 것이 그의 임무인 듯 싶다.
 종이를 부조로 하여 엠보싱의 효과를 극대화한 점이 돋보이지만 원근처리엔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는 듯 하다. 등장하는 생물들의 끊임없이 이야기, 그것이 이씨 작품세계의 주된 테마가 아닐까.
 아무튼 2천호가 넘는 연작시리즈와 4억원이라는 엄청난 가격은 팔리든 말든, 향토화단에 또하나의 진기록을 세우고 있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