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한숨을 몰아쉬며 컴컴하고 무거운 하늘을 올려다 보는데, 맑디 맑은 노래가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오르는 푸른 뱀처럼 귀에 감겼습니다. 그 소리를 무엇이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물보라에 깜짝 놀란 아이처럼 황급히 참나무에 숨어 냇가를 훔쳐보았어요』(나, 황진이 중 「知音相逢」)
 
 조선의 명기 「황진이」를 다룬 역사소설이 주석판과 더불어 출간돼 화제가 되고 있다.
 최근 도서출판 푸른역사에서 출간된「나, 황진이」는 역사를 문학화한 작품 중에서도 가장 철저한 고증과 문체미학을 살린 역사소설의 새로운 실험을 시도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소설에는 황진이의 내밀한 심경을 형상화한 백범영 화백의 수묵화 60여 점이 수록돼 있고, 주석판에는 「나, 황진이」의 창작과정을 유추할 수 있는 6백여 개 주석과 작가의 창작보고서, 소설 창작의 밑거름이 된 관련문헌 등이 수록돼 있다.
 역사소설은 「소설」이 지닌 주관성에 「역사」가 지닌 객관성을 모두 아울러야 하므로, 집필에 앞서 많은 고증과 연구가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야사나 단편적인 사건들을 짜깁기해 흥미 위주로 서술된 작품이 역사소설의 주류를 이뤄 왔다.
 게다가 개화기 이후 현대문학과 고전문학이 분리되면서 대부분의 작가가 현대문학의 영향 아래 성장하게 됐고, 그런 까닭에 제대로 된 역사소설은 점점 더 나오기 힘들어졌다.
 「나, 황진이」는 이러한 역사소설의 한계 상황을 극복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중종 시절 송도의 명기 황진이는 역사적으로 상반된 평가를 받아온 인물이다.
 한쪽에서는 여러 남자를 섭렵한 재주 있는 기생으로, 다른 한쪽에서는 조선 중기 여성의 한계를 극복한 대표적인 인물로 칭송하며 서경덕의 제자이자 화담학파의 대모로까지 평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황진이에 대한 일반의 인식은 전자에 머물러 있으며 이는 이태준의 장편소설 「황진이」를 비롯해 지금까지 출간된 황진이 류 소설의 영향이 크다.
 황진이는 신분상 문집을 만들 형편이 아니었고 다른 사대부 문인처럼 행장에 근거하여 정확한 일생을 추적하는 것도 불가능하며, 「조선왕조실록」에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처럼 관련기록이 거의 전무하기 때문에 역사적 접근이 불가능했고, 그러다 보니 야담에 근거한 소설 속 모습이 황진이의 실체로 굳어졌다.
 작가의 말처럼 누구나 황진이를 알지만, 아무도 황진이를 몰랐던 것이다.
 이 소설은 저자 김탁환 외에도 책을 완성시키기 위해 수많은 학자들이 참여했다.
 백범영교수(용인대·화가), 안대회교수(영남대·한문학자), 정재서교수(이화여대·중문학자), 장일구씨(문학평론가·제1회 혼불학술상 수상자) 등 이 책의 면모를 알 수 있게 하는 학제들의 공동연구가 밑거름이 됐다.
 작품을 읽다보면 접속사가 하나도 없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작가가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단어와 문장 하나하나마다 퇴고를 거듭하며 전고를 찾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나, 황진이」는 종래의 사건 중심 서술을 거부한다.
 이 작품은 비사건적인 서술로도 얼마든지 소설이 가능할 수 있다는 점을 예시한다.
 고전소설에서 흔히 보였던 때 아닌 객담, 주제 이탈, 박물지(博物誌)적 나열 등은 이 작품에서 기존의 소설문법을 돌파하는 훌륭한 장치로 작용하고 있다.
 또 「나, 황진이」의 내용은 얼마 전 페미니즘 논쟁을 일으켰던 이문열의 「선택」과 대극점에 서 있기도 하다.
 가부장제 하에서 한 집안을 최선을 다하여 꾸려나가는 여성을 전면에 내세운 「선택」에 비해, 「나, 황진이」는 그 조선조 가부장제 사회에 저항하면서 일탈을 꿈꾼 여성의 삶을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보기 드물게 주석서와 함께 출간된 이 책은 황진이에 대한 역사적 재조명과 함께 역사소설의 새로운 구도를 그리게 될 것이다.
 (김탁환 지음·백범영 그림·푸른역사·9천 5백원·주석서 1만 5천원) 순천문고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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