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김호일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사무총장

여름 내내 소나무 밤나무에 매달린 잎들이 가지를 떠날 채비를 서두를 것 같이 아침저녁 바람도 제법 차다. 바다처럼 파도가 없어서 더욱 깊은 자태를 뽐내는 '대청호'에는 남쪽으로 떠나지 못한 '여름철새'들이 마치 어머니의 젊은 시절 잘도 어울리던 여우목도리처럼 포근한 갈대밭 옆에서 이별의 아쉬움에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는 않을까 궁금하다. 필자에게는 청주에서 맞이하는 첫 번째 가을이 조금은 어색하고 가끔은 부끄럽다. '문의면'의 제법 넓은 평야에는 고개 숙인 벼들이 추수를 기다리고 '공군사관학교'가는 길목에는 이제 곧 물들기를 기다리는 고목들이 가을 행락객을 맞이하고 있다.

 이 가을 고개 숙인 벼들이 내는 황금빛깔은 자연의 빛으로 더없이 숭고하며, 화가들이 화폭에 담아내는 완성의 작품처럼 다가온다. 이 가을 청주의 가을빛은 찬란하되 번쩍이지도 않고, 황홀하되 자극하지도 않으며, 눈부시되 찬란하지도 않다. 참으로 소박하고 아름답게 늦가을 전야를 물들이는 빛이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벼들의 모습은 겸허하고 거룩하다. '초정약수' 가는 길의 언덕배기 밭두렁에도 호박꽃의 황금빛깔이 정겹다. 내가 자란 고향 길과 사뭇 다르지도 않다.

 음성군 '감곡'에는 한여름을 지나 성장한 '햇사래'란 이름으로 성숙한 복숭아가 개선장군처럼 줄지어 새색시 시집가듯 팔려나간다. 농부의 손길이 닿은 낡은 '비닐하우스'들이 이시대의 역사처럼 줄지어 있다. 농토는 아버지의 인생이다. 고추밭 가꾸시는 어머니의 마음도 하늘의 정성이다. 유난히도 무더웠던 지난여름도 잊히고 이제는 바람과 비가 만나서 빚어낸 상처의 빛깔들을 저 들판이 감당하는 것은 아닐까? 격동의 하늘이 바다와 함께 보여주던 태풍은 인간의 작고 초라함을 새삼 확인해주는 은총의 공연이리라. 하늘이 내려다보는 '무심천'도 이제는 조금씩 가슴을 열면서 억새처럼 손짓하고 있다.

 오늘은 유난히 홀로 길을 나서고 싶다. 이름 모를 작은 마을 농가의 가족에게 풍요를 주는 저 가을 들판에 서서 벼들처럼 나도 고개를 숙일 수 있을까. 누구는 '벼가 고개를 숙이는 것은 단지 고개를 들면 먼저 잘려나가기 때문이다'라고 한 괴변이 생각난다. 이제 곧 추수가 끝나면 들판도 말끔히 비워지겠지. 찬란하던 황금빛도 사라지고 흙으로 녹아 퇴비의 색이 될 터이다. 내 인생은 어떤 색일까? 노력도 시련도 없이 보호색을 칠하며 화려한 색깔을 탐하여 온 것은 아닐까. 계절의 여왕이 봄이라면 가을은 계절의 황제이다. 고개 숙인 벼들의 가운데에는 어김없이 허수아비가 서 있다. 생명력도 없이 바람을 타고 헛 모습만 뽐내고 있는 나는 허수아비는 아닐까. 산천과 들판을 찬란하게 하는 태양빛은 무채색이지만 눈이 부시다. 문득 '무심천'과 '미호천'의 저녁노을도 365일 붉지만은 않다. 구름에 가린 날들도 있으며 폭풍전야를 만나기도 한다. 바다와 하늘이 둘이 아닌 것은 모두가 우주에 매달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을의 한복판에 이르는 시월에는 저기 '우암산'자락과 '상당산' 앞으로 펼쳐진 '맑은 고을'로 뻗어 나가면 있을 '속리산'이나 '화양계곡'이라도 또 한 번 찬찬히 만나보고 싶다. 고향집 문 앞 떠날 때 잘 가거라! 하시던 어머니. 나는 지난해 추석, 어머니의 손을 놓고 돌아 나오던 발걸음이 무거워 참으로 죄송하였다. 그런 어머니를 금년 추석에는 찾아뵙지도 못할 것 같다. 대신, 오늘 오후 핸드폰 넘어 들려주신 어머님의 음성에서 절절히 녹아있는 이아들을 기다리시는 그 마음을 잊지 않아야한다. 이제 곧 급한 일이 없는 주말에는 한 이틀 어머니를 뫼시고 청주 이곳저곳을 찬찬히 구경시켜 드려야겠다. 아마도 이러한 필자의 마음은 요 며칠 사이에 고향을 찾을 이른바 출향인사들과 청주 이외의 자신의 고향으로 발길을 향할 귀성객들 역시 같은 마음이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추석을 민족 최대의 명절이라고 부르며 외국인들이 보았을 때 이해 못하는 민족의 대이동을 하는 것이리라. 기네스북 등재라는 쾌거를 이룬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의 조직위원회 구성원들은 이러한 이동하는 이유나 목적에 적으나마 일조하고픈 마음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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