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준 칼럼] 논설실장 대기자

지난 추석연휴에 시골길을 가다가 마을입구에 걸린 플랜카드가 눈에 들어왔다. 마을 이장 아들의 기상직 공무원 합격을 축하하며 누군가 걸어둔 것이다. 올해 국가직 7급 공무원 시험 평균 경쟁률은 81.9대 1이었다. 고시패스는 아니더라도 이 정도면 플랜카드가 내걸릴만 하다. 하지만 이는 약과다. 올 국가직 9급 최고 경쟁률은 무려 734.3대 1이었다. 실력은 기본이고 조상의 음덕이 있어야 공무원에 도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시족(公試族)'이 넘쳐나는 현상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공무원에 목매는 학생들이 넘쳐나는 획일화된 문화가 한국 대학가의 민낯이다. 대기업은 물론 탄탄하던 은행마저도 속절없이 쓰러졌던 IMF사태 충격 이후 이런 문화가 강해졌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청년실업이 이런 현상을 부채질했기에 학생들만 탓할 수 없다. 얼마 전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2015 공직박람회'에선 개막식이 열리기도 전에 10대부터 60대까지 수백 명이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왜 공무원이 인기냐고 묻는 것은 우문(愚問)이다. 아이들도 다 안다. '철밥통'이기 때문이다. '깨질 염려가 없는 밥통'은 직장인의 로망이다. 안정적이고 해고의 염려가 없다. 철밥통은 정리해고나 부도 걱정이 없으며 퇴직이 보장되는 공무원을 '비아냥' 거릴 때 쓰인다. 공직사회는 신분이 보장되니 복지부동하고 매너리즘이 만연됐다. 을(乙)의 위치보다는 갑(甲)의 위치에 서있는 경우가 더 많다. 물론 음지에서 사명감을 갖고 일하는 공무원도 많지만 되는것도 없고 안되는 것도 없는 것이 공직사회다.

"공무원에겐 자신의 임기 중 아무것도 안 하려고 하는 님트(NINT·Nat in my term)病이 있다." 사업가가 한 말이 아니다. 사무관으로 시작해 장관까지 역임한 이희범 전산업자원부 장관이 한 말이다. 그는 몇 년 전 특강에서 30여 년간 공직생활을 통해 체험한 공직사회의 보신주의를 고백한바 있다. 실력이 쟁쟁한 우수한 대학생들이 공무원에 젖게 되면 보신주의라는 병에 전염된다.

자치단체 공무원도 마찬가지다. 실례는 널려 있다. 청주시는 추석연휴에 동물원과 놀이공원이 있는 청주랜드를 휴관한다고 밝혔다. 정부가 대체휴일까지 만들어 나흘간 쉬는 판에 어린자녀를 둔 가정은 갈 곳이 없다. 당연히 일부 시민들의 불만이 쏟아졌다. 담당부서의 변명이 기가 막힌다. 조례에 명절당일과 월요일은 휴관하는 것으로 나와 있는데다 직원들이 피곤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동일한 시설이 문을 연 타시·도 논리와 딴판이다. 결국 여론에 떠밀려 문을 열기는 했지만 청주시의 무개념이 놀라울 뿐이다. 철밥통이 이런 황당한 에피소드를 만든것이다. 단적인 예지만 중앙부처라고 다를 리 없다.

이 때문에 역대 정권마다 공직개혁은 핵심과제였다. 하지만 공직사회가 혁신됐다는 말을 들어 본적이 없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정부가 공직개혁의 칼을 빼들었다. 인사혁신처를 통해 공무원 철밥통 깨기에 나선 것이다. 인사혁신처는 최근 인사의 포인트를 능력과 성과에 두기로 선언했다. '온정주의 및 연공서열' 중심의 성과 평가를 지양하겠다는 것이다. 업무성과가 미흡한 고위공무원은 재교육을 시키고 심할 경우 직위해제 및 직권면직도 단행한다는 것이다.

공무원 반응이 어떨까. 아마 크게 긴장하는 공무원은 별로 없을 것이다. 새삼스러운 제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10년 전에도 무능 공무원 퇴출제도가 있었다. 특히 고위공무원에 대한 적격심사 및 직권면직 제도는 2006년부터 운영되고 있었으나 실질적으로 면직까지 이뤄진 경우는 단 한 차례도 없었다면 알만하다. 문제 있는 공직자가 불이익을 받기는 커녕 정년 즈음이 되면 외려 산하기관에서 공직 2막을 시작하는게 현실이다. 세월호 참사이후 유행한 말이 관료마피아다. 원래는 모피아(재무부)만 있었으나 지금은 힘깨나 쓰는 모든 정부부처에 마피아를 붙여 만든 신조어가 난무하고 있다. 제도가 없어서 공직개혁을 못하는 것은 아니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김수영의 시 '풀'처럼 정권의 서슬이 심상치 않으면 공직사회는 바람보다 더 빨리 눕는 풀이 된다. 정권이 바뀌길 기다리는 것이다. 신상필벌은 사전에만 있는 고어(古語)가 됐기 때문이다. 2년여쯤 남은 박근혜 정부에서 공직사회가 정말 환골탈태(換骨奪胎)될까. 아마 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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