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변광섭 동아시아문화도시 사무국장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변화와 순환의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북풍한설을 뚫고 피어난 꽃들이 열매 맺고 오방색 물결로 가득하더니 낙엽이 지고 있다. 푸른 하늘과 드넓은 바다 역시 매일 새로운 빛과 물결을 보여준다. 우주의 변화와 순환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거대한 생명체인 것이다. 숲속의 동물들도 그러하고, 생로병사의 운명을 함께하고 있는 사람 또한 그러하다.

우리는 이따금 일상이 번잡하며 건조하다고 투덜댄다. 모든 일들이 극적인 순간임에도 변화와 순환에 대해 깊은 사색을 하지 않는다. 생존을 위해, 아름다운 날을 위한 두근거림의 비밀을 알려하지 않는다. 무엇이든 그 속성을 알기까지는 진한 성찰과 아픔을 견뎌야 한다. 사람의 마음을 집요하게 흩뜨려놓는 충격적인 사건이 있어야 그제서 고개를 끄덕인다. 역사와 문명은 창조적 진화라고 하지 않던가.

동아시아문화도시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11월 10일 문을 여는 젓가락페스티벌이다. 사람들은 흔해빠진 젓가락으로 무엇을 하겠냐며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2천 년 넘게 생명문화를 이어 온 궁극의 디자인이며 수많은 콘텐츠가 담겨 있기 때문에 최고의 아이템이라고 흥분하는 사람도 있다. 모든 것이 그렇지만 새로움 앞에서는 머뭇거릴 수밖에 없다. 두려움이 왜 없겠는가.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 있을 때,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을 때 새 날이 오는 것이다.

행사를 준비하다보니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한중일 3국을 비롯해 젓가락을 사용하는 7개국 전문가들로 구성된 국제젓가락협회에서는 임원들이 단체로 청주를 방문하기로 했다. 일본의 젓가락마을인 오바마시와 중국 상하이시에서는 자국의 유물 젓가락을 소개하는데 적극 협력하고 있으며, 젓가락장인들의 참여도 잇따르고 있다. 젓가락의 날 행사를 위해 해외에서만 100여 명이 방문한다.

젓가락으로 새로운 예술의 장르를 개척하자며 작가들과 컬렉터들의 참여도 계속되고 있다. 공예로서의 젓가락은 물론이고 회화, 조소, 설치미술, 디자인 등의 다양한 장르에서 새로움을 선보이고 싶은 것이다. 천당과 지옥을 이야기하는 3척 젓가락, 분디나무(산초나무) 젓가락, 붓젓가락 등 진기명기 젓가락을 소개하고 문화산업과 스토리텔링 콘텐츠로서의 가능성을 엿보게 될 것이다.

크리에이터 이어령 선생은 젓가락이야말로 아시아인의 문화유전자라고 말한다. 젓가락은 가락을 맞추는 생명의 리듬이고, 젓가락은 짝을 이루는 조화의 문화이며, 젓가락은 천원지방(天圓地方)의 디자인 원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젓가락은 음식과 인간의 인터페이스이며, 젓가락은 하드웨어, 젓가락질은 소프트웨어라는 것이다.

그렇다. 젓가락은 2천년을 넘게 한중일 3국이 사용해 온 궁극의 디자인이며 계급과 부의 가치를 초월해 평등한 문화콘텐츠다. 젓가락은 음식이며 생명이고 문명이다. 젓가락은 디자인이고 교육이며 음양의 조화다. 그리하여 젓가락은 예술이고 장단이며 인류유산이다. 가장 완벽한 공예고 과학이며 즐거운 소풍이다. 젓가락으로 하루 세 번 황홀한 여행을 하지 않던가.

언제나 그랬지만 새로운 일 앞에서는 앙가슴 뛴다. 그 설렘 속에는 두려움도 있고 몸이 힘들어 괜한 짓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후회도 있지만 설렘 때문에 지루한 줄 모르고 살아왔다.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머뭇거리지 않고 설렘을 품으며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가려는 열정과 의지 때문이 아닐까.

오늘따라 밥상머리 앞에서 젓가락이 내 희미한 기억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사소하고 하찮은 것으로 치부했던 젓가락에 대한 미안함과 연민의 정이 끼쳐온다.

그리고 젓가락과 함께 해 온 나의 삶의 노정이 부끄럽지 않도록 해야겠다. 젓가락페스티벌이 세상 사람들에게 마음의 풍경을 바꾸고, 삶의 향기를 주며, 새로운 미래를 열어주면 좋겠다. 젓가락으로 문화를 집고, 세상을 담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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