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김호일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사무총장

어느덧 가을은 마치 어머니가 만드시던 된장의 깊은 맛처럼 익어만 간다. 변신은 무죄라 하였던가. 아직 채 나무를 떠나지 못한 주홍빛 감들이 이웃집 담 너머에도 주렁주렁하다. 청주 시내를 동맥처럼 흐르는 무심천변의 억새풀들도 세상 돌아가는 모습에 걱정인 듯 스산한 가을바람에 이리저리 고개를 젓고 있다. 40일간의 공예비엔날레를 마치고 모처럼 무심천을 동무삼아 여유롭게 걸어본다.

무심천 따라서 미호천을 만나러 가는 길목에는 여기저기 맛 집들에서 풍겨 나오는 구수한 '묵은지 짜글이'와 '뚝배기해장국' 냄새가 입안의 침을 부른다. 무심천과 미호천이 만나는 지점에는 제법 깊어 보이는 물웅덩이도 여럿 있다. 또 대낮인데도 드리운 낚싯대가 여럿이다. 붕어야 잡히든 말든 여유로운 어르신의 뒷모습이 쓸쓸해 보인다. 저만치에 하얀 물체가 눈에 들어온다. 뜻하지 않은 횡재이다. '백로'다. 아! 무심천의 백미이다. 무심천의 백로도 푸른 솔을 둥지 삼아 청주의 청정 가을을 즐기는구나. 순간 나도 온 몸 전체가 하얀 '백로'가 되어 산수화처럼 날고 싶다는 생각이다.

이번 주말 비라도 내리면 올해도 이제 곧 저녁 해와 함께 길을 지우고 나무들도 하나씩 잎들을 내려놓고 초겨울의 가슴팍으로 떠날 채비를 하겠지. 세상사 모두가 고해라 하였는가? 소리 없는 바람은 날 어디로 보내려고 내 등을 떠미는가. 이 겨울 오기 전에 내가 가져다 준 상처에 눈물 흘린 벗들은 몇이던가. 위로와 사죄의 차 한 잔을 준비하여야 한다. 마치 백로의 모습이다. '천연기념물'인 백로는 왜가릿과에 딸린 새를 통틀어 지칭한다. '백로'는 둥지부근의 논이나 개울가, 저수지, 호숫가 등에 모여 산다. '백로'는 여름철새인데 봄에 우리나라를 찾아와 여름을 보내고 10월 말이 되면 큰 무리를 이루어 따뜻한 남쪽 나라로 이동한다. 온몸이 하얗고 큰 날개와 짧은 꽁지, 유난히 긴 다리와 목을 지닌 우아한 새 '백로'는 옛날부터 청렴한 선비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시와 그림들을 보면 '백로'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들이 참 많다.

옛날부터 사람들은 백로가 깃들면 부자마을이 된다고 믿고 산다. 우리나라에서 알려진 백로 서식지는 모두 다섯 곳이다.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신접리, 전남 무안군 무안면 용월리, 강원도 양양군 현남면 포매리, 경남 통영시 도산면 도선리,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압곡리가 백로 서식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지만 무심천과 미호천에서도 가끔은 백로를 만날 수 있다.

청주에 백로가 찾아오는 이유는 농약을 함부로 뿌리지 않고 도심지나 외지와 달리 청정한 지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백로들은 오염된 작은 물고기나 개구리·뱀·우렁이 같은 것을 먹고 병들거나 죽어가서 해마다 백로 가족의 수가 줄어들고 있어 안타깝다. 한편 몇 달전 발생한 '청주남중'의 백로서식지 간벌은 인간과 자연이 어떻게 조화롭게 공생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거리를 남겨주었다. 남중의 백로 서식지 확보와 학생들의 학습권 보장이 충돌할 경우 대안은 무엇일까. 이런 문제는 장기적인 숙제이면서 동시에 단기간에 효율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임에 분명하다.

그러면서도 '맑은 고을' 청주라는 단어에 걸맞도록 무심천과 미호천 그리고 대청호 주변의 크고 작은 저수지에 둥지를 튼 백로가 매년 더 많은 가족을 데리고 다시 날아와 줄 것을 염원해 보면서 동시에 일상적인 삶과의 조화가 이루어지기 위해 백가쟁명(百家爭鳴)해서라도 부디 멋진 결말을 기대해 본다. 청주가 '생명문화도시'로 변모해 가는 길이야말로 '자연 중심'이 되는 길이며, 자연이 중심이 될 때 인간의 안식처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청주국제공항'에 비행기가 착륙할 때 기내 승객들에게 '생명문화의 도시 청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말 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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