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사라지고 있다고는 하나 도내에는 아직도 빼어난 입지 조건을 배경으로 상당수의 종족촌락(집성촌)이 존재하고 있다.
 특히 집성촌은 강한 연적(緣的) 관계 때문에 선거철이 되면 정치인들의 주요 공략 대상이 돼 왔다.
 한국 교원대 전종한(35ㆍ지리학) 강사가 이에 대한 논문 「종족집단의 거주지 이동과 종족촌락의 기원에 대한 연구」(-14~19세기 보성 오씨 사례를 중심으로)를 발표, 학계는 물론 일반의 관심을 끌고 있다.
 논문에 따르면 보성 오씨의 첫 출발지는 본관의 지명과 같은 전남 보성이다. 시조 오현필(吳賢弼)이 1216년(고려 고종3년) 거란군을 격퇴한 공으로 「보성군」(寶城君)에 칭해지면서 전라남도에 정착, 그 후손들이 그의 칭호를 따 전남 보성을 본관으로 삼았다.
 그러나 지금은 전국 12곳의 보성 오씨 집성촌중 8곳이 청주 주변에 집중 분포하고 있는 등 청원군 현도면 달계리가 보성 오씨의 총본산으로 인정받고 있다.
 청원군 현도면 달계리는 어떤 정치, 사회적 변천과 이동 과정을 거쳐 시조지(始祖地) 다음의 총본산이 됐을까.
 전씨는 그 이동 경로로 ▶후손들의 중앙정계 진출 ▶한양 인근에 거주지 확보 ▶그에 따른 토지와 종족경관(사당, 서원, 선상) 확보 ▶이후 후손들의 번창으로 집성촌 공고화 등을 제시했다.
 그는 『보성 오씨중 현도면 달계리에 처음 정착한 사람은 9세 숙동으로, 그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피해 이곳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며 『그의 후손들이 정치적으로 성공을 하면서 현도면 달계리가 총본산이 됐다』고 밝혔다.
 조사결과 조선시대 생원, 진사에 합격한 보성 오씨 문생 71명중 현도 출신이 전체 51%인 36명, 공주 5명, 임실 2명, 기타 8명 등인 것으로 나타났다.
 전씨는 전국 보성 오씨 집성촌중 현도출신 과거 합격자가 유독 많은 것은 당시 현도 근처에 조선 성리학의 거두인 송시열이 거주, 교육환경이 매우 좋았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했다.
 그러나 이는 9세 숙동만을 통해 분석한 것으로, 여타 보성 오씨들은 족보상 거주지와 묘소 위치를 확인한 결과, 정치적 지위가 낮고 사회가 안정됐을 때는 단거리 이동을, 정치적 지위가 높고 변란이 일어났을 때만 장거리 이동을 한 것으로 분석됐다.
 그는 보성 오씨 외에 광산 김씨, 회덕 황씨, 은진 송씨 등도 비슷한 현상을 보였다고 밝혔다.
 전씨는 결론으로 『우리나라 집성촌은 연적(緣的) 관계를 중시하는 유교 이데올레기와 당시 정치환경의 산물이었다』며 『그러나 그것은 미국 흑인들이 보여준 비자발적 군집현상이 아닌 「자발적 군집현상」(인클레이브ㆍenclave) 모습을 띠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전씨는 연구 대상으로 보성 오씨를 택한 이유에 대해 집성촌 형성이 잘 되있고, 종토(宗土) 등 증빙 기록이 풍부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보성 오씨중 유명인사는 오제세 전청주시장, 오효진 청원군수, 오범수 충청대학 설립자, 꽃동네 오웅진 신부, 오희필 전 대전대총장, 오현진 청주대 교수, 오희중 대전 대덕구청장 등이 있다.   / 조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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