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군란은 실패한 군인들의 반란인가, 아니면 민족주의 운동의 효시인가.
 서원대 김정기 총장(한국사)이 임오군란 1백20주년을 맞아 「임오년에 다시 보는 120년 전의 임오군란」 역사수상을 발표했다.
 지금까지 알려진 임오군란은 쌀배급에 불만을 품은 당시 수도방위군 1만여명이 1882년 7월 집단적인 반란을 일으킨 것을 말한다.
 각종 역사서는 임오군란에 대해 「13개월 밀린 쌀봉급에 겨와 모래가 섞여 있고, 그나마 정량이 크게 모자라자 수도방위군이 집단적인 반란을 일으켰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김 총장은 군인들이 1, 2차 봉기 후 ▶포도청, 의금부 습격 ▶어용성을 띠었던 시전상인, 시정상가 공격 ▶일본 대시관 습격 ▶당시 국가 재정을 축냈던 사찰, 무당집 공격 등의 이유를 들어 『임오군란은 군인들의 단순 반란이 아닌 민족주의 운동의 효시였다』는 견해를 내놨다.
 김 총장은 『당시 군인들의 반란에는 행상, 영세 수공업자, 노동자, 농민, 부랑아 등 하층민 대부분이 가담했다』며 『이는 궁극적으로 당시 사회상의 모순이 군인들의 행동을 계기로 폭발을 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임오군란이 실패한 것에 대해서는 흥선대원군의 정치적인 야욕에 교묘히 이용당했고, 또 조선에서의 합적법인 약탈을 보장한 주변 열강(청나라, 일본)과의 조규ㆍ장정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는 결론으로 『임오군란은 저항주의가 태동과 함께 일어난 민족주 성격의 운동이었다』며 『이는 동학농민전쟁의 자양분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 조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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