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리우드에서 테크니션으로 인정받는 캐트린 비글로우 감독은 여성이면서도 「남성적 장르」로 불리는 액션, 스릴러, SF 등에서 역량을 과시한다는 점에서 독보적이다. 그의 영화들은 누구도 쉽게 감독의 성(sex)을 분간하지 못할 만큼 강력한 액션과 박진감넘치는 스타일을 구사하며, 주로 힘/권력의 문제에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관심은 현실에서 힘/권력의 소유자인 남성 혹은 남성성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다. 여형사와 사이코 살인범 대결을 통해 성(gender)과 권력의 문제를 꼬아서 배치했던 「블루 스틸」이 그랬고, 카메라 움직임이 매혹적이었던 「폭풍 속으로」에서는 근사한 남성 육체와 그들의 관계맺기를 치밀하게 추적하기도 했다. 바로 이같은 지점, 그러니까 남성성에 대한 탐구가 일종의 관음증적 욕구마저 충족시키는 스펙터클을 만들어낸다는 점에 비글로우 감독의 차별성이 놓인다.
 남성적 판타지를 주로 구현한다는 장르적 공간 안에서 여성이라는 「타자성」을 활용하는 비글로우 감독의 이런 전략은 그 성과가 상업적이면서도 전복적인 결과를 낳는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리고 이같은 타자성의 효과를 새삼 실감케하는 영화가 「K-19」라고 할 수 있다.
 미소 냉전이 절정에 달했던 1961년. 나토기지 근처 깊은 바닷속에서 방사능 누출사고로 3차대전을 일으킬 뻔했던 러시아 핵잠수함 K-19호의 이야기를 영화화한 이 작품은 익숙한 잠수함 영화의 공식들과 함께 진부하기까지 한 영웅주의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하지만 러시아 액센트 섞인 영어를 말하는 배우들이 출연한 이 영화는 앞선 영화들의 중요한 전제였던 「적」(러시아) 대 「아군」(미국)의 대립이 배제되면서 묘한 변종이 됐다.
 급박한 한계상황에 내몰리는 폐쇄공간 속 인물들이 절대적 가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영웅탄생의 시나리오를 완성하지만, 그들에게는 이미 특정한 국가적·이데올로기적 정체성이 무의미해진 것. 따라서 「위대한 미국」을 설파하겠다는 적극적 의지가 없는 이 영화에서 찬미되는 것은 의무에 헌신함으로써 명예와 자긍심을 지키고 인류애를 실현하는 군인들이다.
 그리고 여기서 비글로우 감독의 차별성이 드러난다. 운명의 기로에서 영웅적 선택을 단행하는 군인들에게서 일체의 정치적 배경을 없애는 대신 그들의 남성성에 경탄하고 찬사를 보내는 것이다. 여성 캐릭터가 부재하는 잠수함 영화의 장르적 특성과 탈냉전적 태도를 일종의 안전판으로 삼으며 영웅성의 근원을 남성성에서 찾는 이같은 낭만적 태도는 K-19호 승무원들이 망중한을 즐기는 빙산 위의 한 때와, 미군 헬기를 상대로 한 바지내리기 시퀀스 등에서 집약적으로 드러난다. 그 젊거나 늙은 남자들의 순수한 열정과 하나됨의 환희, 당당한 호기등을 기록하는 카메라의 시선이 무궁한 경외감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다.
 물론 해리슨 포드가 반복하는 마지막 묘지에서의 영웅찬가는 사족이라 할 만했다. 하지만 「K-19」는 시선의 주체가 다르면 마초들의 역겨운 자기과시도 경청할만한 예찬론이 될 수 있음을 입증하는 한 사례가 됨직하다. 그리고 그 설득의 주요한 힘은 해리슨 포드와, 그보다 조금 더 빛났던 리암 니슨이라는 멋진 두 「남자」에게서 나오고 있다. /whereto@jb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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