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칼럼] 오상영 영동대 경영학과 교수

존 체임버스 시스코 회장은 사물인터넷(IoT, Internet of Things)을 가리켜 인류를 향한 혁명의 시작이라고 주장했다.

IoT는 정보통신기술(ICT)을 기반으로 갖가지 사물과 사람을 인터넷으로 연결해 인프라이다. 따라서 IT의 확산은 생활 속 불편함을 해소하는데 상당한 영향이 있을 것은 틀림없다. 실제로 비슷한 기술의 하나인 블랙박스는 움직이는 자동차에 설치해 과거를 볼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예전과 다르게 교통사고가 발생해도 시비를 가르는 것이 쉬워졌다. 기술이 생활 속에 스며들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첨단기술을 판매하는 많은 기업들이 망하기도 한다. 기술이 첨단에 있다는 것 자체로 성공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증거이기도 한다. 시스코 회장의 예상과 달리 사물인터넷이 특정 기업에 일시적으로 부를 축적시킬 수는 있어도 인류의 생활을 근본적으로 바꿀 것이라는 것은 착각일 수 있다.

이미 세상은 정보화를 기반으로 수백 배의 생산성을 높였다. 그렇지만 사람들의 업무량, 업무시간은 줄어들지 않았다. 즉 높아진 생산성만큼 휴식 시간이 늘어나지 않는 것이다. 컴퓨터의 등장이 인류의 3대 혁명의 하나라고 하지만 겉의 화려함에 비해 속은 화려하지 못하다. 정보화 이전에 불가능했던 것들을 정보화를 통해 해결했지만 또 정보화로 인한 불가능한 것이 생성되기도 했다. 그와 반대로 보잘 것 없는 기술이지만 인간 생활의 필수품으로 존재하는 것들도 많다.

인간 생활의 근간이 되는 경제는 인간의 기본적 욕구인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경제의 기초적인 요소는 토지, 노동, 자본이지만 이들이 의식주를 책임지지 못한다. 이들 3요소가 융합을 해야 경제가 만들어진다. 즉 첨단기술이 존재하거나 훌륭한 자산이 존재해도 사람이 융합시키는 역할을 수행하지 않으면 그 힘을 발휘할 수 없는 것이다.

인기리에 개봉된 '인터스텔라'라는 영화의 내용을 보면 최첨단의 5차원의 과학을 배경으로 스토리가 전개되지만 인간이 보호하고자 하는 식량은 수천 년간 유지돼온 단순한 옥수수였다. 즉 기술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점정(點睛)에 의해 기술의 수명이 결정되는 것이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 사회는 갈등과 대립 속에 혼란을 거듭해왔다. 혹자는 국가적 재난 사태의 여파가 원인이라고 치부하기도 했다. 혼돈 사회가 갖는 특징의 하나는 부족한 개인의 힘을 만회하기 위해 조직을 만드는 것이다. 힘을 결집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은 피아를 구분해놓고 격렬한 싸움을 벌인다.

이러한 갈등 구조 속에서는 아무리 훌륭한 기술력을 보유한다고 해도 그 가치를 실현시킬 수는 없다. 을미년을 보내며 대학 교수들은 우리 사회의 현상을 사자성어로 표현하였다. '혼용무도(昏庸無道)'이다. 혼용(昏庸)은 어리석고 무능한 군주를 가리키는 것이며, 무도(無道)는 세상이 어지러워 도리가 제대로 행해지지 않음을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주장은 우리 사회의 발전이 창조경제를 구성하는 기술보다 사회 통합이 중요하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서두에 언급했듯이 최근 기술의 발전이 인간과 사물을 묶어주는 새로운 형태의 삶의 문화를 만들어 주고 있다. 또한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다양한 분야에 있는 최고의 지식인들에게서 어렵지 않게 지식을 얻을 수 있거나 공유할 수 있다. 따라서 첨단 기술의 혜택을 보고 있지만 사회적 갈등이 줄어들지 않는 이유는 지식과 인간 문화가 접점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술의 첨단화, 혁신적 기술, 고도의 효율성을 자랑하는 창조적 기술도 기술지상주의의 프레임에 매몰되어서는 인류의 혁명적 변화를 이끌 수는 없다. 우리 사회는 중등-고등교육, 그리고 가정교육에서 좀 더 인간의 가치적 측면에서 접근되어야 한다. 국가의 발전 토대가 되는 선진국 형의 경제성장은 건전하고 긍정적인 국가의 사회문화를 기반으로 가능하다.

그리고 국민 통합을 이룰 수 있는 사회문화는 교육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창조와 융합의 시대를 갈구한다면 국민의 올바른 가치관 정립에 투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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