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칼럼] 오상영 영동대 경영학과 교수

경제 성장은 언제나 새로운 혁신을 통해 태동한다. 경영 또는 기술 전문가 모두가 공감하는 말이다. 그리고 혁신은 교육에서 출발한다는 점도 동의한다. 그러나 '새로운 혁신'의 본질적 의미를 해석하는 것에는 이견이 많다. 공학이 혁신을 주도한다는 주류와 혁신의 기반은 인문학이라는 주류의 대립이다. 최근 교육부의 프라임정책에 있어 이공계 우대이냐 인문계 홀대이냐는 논쟁이 한 예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중등교육과정부터 이어지는 고등교육과정의 체계적 접근의 시도로 보아야 한다. 중등교육의 '2015 개정 교육과정'은 학생들의 인문·사회·과학기술에 대한 기초적 소양을 함양할 수 있도록 설계한 교육과정이다. 이를 통해 인문학적 상상력과 과학기술 창조력을 갖춘 창의·융합형 인재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한국 교육의 근본적인 패러다임을 전환하고자 하는 것이다. 최근 구글이 선정한 최고의 미래학자 토마스 프레이는 2030년이면 혁신하지 않는 대학의 대부분은 문을 닫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단기간에 첨단 기술과 지식을 가르쳐 일자리를 얻을 수 있도록 하는 교육 기관인 마이크로 대학(Micro College)이 출현도 예언하고 있다. 그러한 이유에서 인문학 홀대, 공학 홀대의 논쟁은 무의미하다.

사회도 기업도 경쟁과 협력을 통해 성장한다. 성공하는 조직의 특징은 경쟁과 협력의 균형점을 맞추어간다. 명확히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경쟁은 기술(공학), 협력은 인성(인문학)을 기반으로 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공학, 인문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 것인가에 대한 논쟁은 불필요하다. 다만 시기적으로 국가의 경제 성장을 위한 초과수요 인력에 대한 추가적인 양성은 필요하다.

유네스코에서는 교육은 무엇이어야 하는가의 질문에 개인의 성공적인 삶의 터전이어야 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교육의 4가지 기둥을 보면 평생 학습자로서의 자질을 갖기 위한 알기위한 학습(to know), 직업인으로서의 능력을 갖기 위한 행동하기 위한 학습(to do), 성취자로서의 존재하기 위한 학습(to be), 세계인으로서의 자세를 갖기 위한 함께 살기 위한 학습(to live together)을 제안하고 있다. 대학 교육은 이러한 틀에서 연계적이고 융합적인 교육을 지향해야 하는 것이다. 피교육자의 성향에 따라 창의성과 개방성, 개인특성과 사회성이 다르게 분출되지만 이는 피교육자의 몫이다.

문제는 교육에 대한 투자이다. 그러나 부족한 국가 재정 문제는 현실적인 문제이다. 따라서 재정 투입의 효율성을 통해 비용 절감과 효과성을 증대시킬 전략이 필요하다. 최근 교육부가 추진하는 산업연계 교육활성화 선도대학 사업도 전략적 접근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교육 과정의 구분을 통해 수요 인력을 양성하여 공급하는 것은 유효한 것이다. 오히려 대학이 고민해야 하는 것은 교육 체계이다.

19세기 말, 헤르만 헤세의 역작인 '수레바퀴 아래서'는 한 영특했던 소년이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에 입학했지만 학교 교육에 흥미를 잃어버리고 학교에서 쫓겨난 후 방황하다가 사망하게 된다. 학생 중심보다 교육기관, 교육자 중심의 교육 문제점이 학생을 죽음으로 몰아갔다는 독일 교육 체계를 비판한 소설이다. 한국의 대학도 학생 중심, 사회 수요 중심의 혁신적인 교육 체계의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

그동안 수십 년 동안 교육 환경 및 피교육자의 사고가 엄청나게 변화했지만 130학점 수준의 졸업학점은 변화가 없다. 교양과 전공, 선택과 필수, 전공과 부전공 등 학사제도도 그대로다. 교육을 위한 시설 장비가 칠판 중심에서 프로젝터 중심으로 변한 것이 약간의 변화된 사항이다. 80년대 대학을 졸업한 50대 이상의 학생이 다시 대학이 들어온다고 해도 생소할 것이 없을 것이다. 경제가 성장했으므로 대학이 변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대학이 변해야 경제가 성장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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