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준 칼럼] 논설실장·대기자

지난 2000년,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 이회창 전대표가 한창 잘나갈 때 얘기다. 그해 이 전대표가 충북도청을 방문했을 때 대통령 초두순시를 방불케 했다. 16대 총선을 앞두고 눈도장을 찍기 위해서 수십 명의 소속 의원들이 수행했던 광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총선 때마다 여야 정당은 '현역의원 물갈이'를 단골메뉴처럼 내놓지만 그 때만큼 머릿속에 각인된 것은 흔치 않다.

당시 '허주'(虛舟·빈배)라고 불린 정치인이 있었다. 기자출신으로 킹 메이커로 불리던 김윤환 전 의원이다. TK의 대부였던 그는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권력세계의 막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이 총재에겐 '정치적 은인'이라는 말도 들었다.

하지만 그는 그해 국회의원 공천에서 탈락했다. 그 뿐만 아니라 얼마 전 작고한 이기택 전의원을 비롯 신상우·오세응·이세기·김정수 등 거물급 의원들이 줄줄이 공천자리스트에서 제외됐다. 당시 한나라당 현역의원 중 26.3%인 29명이 재공천을 받지 못했다. 이 때문에 '공천학살'이라는 말을 들었다.

반면 1998년 대구 달성 보궐선거에 출마해 여의도에 입성했던 박근혜 대통령은 16대 총선에서도 공천장을 받았다. 원희룡 제주지사와 오세훈 전 서울시장도 이때 국회에 발을 들여놓았다. 허주에겐 '배신의 정치'라는 말을 들었지만 한나라당은 개혁공천으로 15대에 이어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을 꺾고 원내 다수당이 됐다. 개혁을 통해 명분을 만들어야 했던 이회창은 대대적인 물갈이 공천에 성공해 다시 한번 대권도전의 발판을 마련했다.

허주는 낙천자들과 함께 민주국민당을 창당해 '영남후보론'을 내세우며 지역구에 재도전했으나 낙선했다. 그 뒤 3년 만에 그는 신장암 선고를 받고 71세의 나이에 별세했다.

선거의 계절에 공천은 늘 화제를 몰고 다닌다. 4·13 총선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공천혁명이든 물갈이든 유권자에게 어필하려면 인지도가 높은 간판급 정치인을 손대야 한다. 이를테면 충격요법이다. 그래야 당 이미지가 쇄신된다. 이런 점에서 더민주당은 공천흥행에 절반은 성공했다. 새누리당도 유권자에게 어필하기 위해 더민주당의 전철을 따를 가능성이 높다. 현역의원들은 당분간 불면의 밤이 이어질지 모른다.

하지만 대중의 주목을 받는 정치인은 떠날 때와 남을 때를 알아야 한다. 자리에 연연하다보면 떠밀려 나간다. 공천장을 쥐었다고 좋아할 일도 아니다. 잘나가던 정치인이 정치말년에 과욕을 부려 출마했다가 낙선했을 때 받는 '상처'는 더욱 클 수밖에 없다.

충북출신 정치인중에 가장 깔끔하고 아름답게 정치를 떠난 사람이 둘 있다.

故 이춘구 전의원과 이원종(74) 전지사다. 청원이 고향인 이춘구는 내무부장관, 민자당과 신한국당 대표를 지낸 여권의 핵심인사였다. 하지만 1996년 헌정질서파괴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의 국회상정에 반발, 의원직을 사퇴하고 정계에 은퇴한 뒤 정치 쪽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나이 62세때 였다. 강재섭 전 한나라당 대표가 정치인으로서 가장 존경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것은 그가 떠날 때를 알았기 때문이다.

이원종 전지사도 2006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각종 여론조사에서 50% 안팎의 지지율로 3선을 눈앞에 두고 용퇴한 뒤 정계를 떠났다.

그는 "두 번에 걸쳐 도지사에 당선되고 40년간 공직에 있으면서 국가로부터 크나큰 혜택을 입었고, 도민들에게서도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다"면서 "적절한 시기에 명예로운 퇴장이 평소 소망 이었다"고 용퇴의 변을 밝혔다.

지금도 대통령직속 지역발전위원장으로 현역때 못지않은 왕성한 활동력을 보이는 것은 '비움의 철학'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시절 정무수석이었던 유인태 의원은 최근 더민주당 공천에서 탈락한 뒤 "평소 삶에서 물러날 때를 아는 것이 소중한 가치라고 생각해 왔다"고 말했다. 그 소중한 가치를 조금만 더 일찍 알았으면 더 존경받았을 것이다.

그나마 이런 정치인을 찾기는 쉽지 않다. 이당 저당 기웃거리면서 정치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정치인이 얼마나 많은가.

별로 하는 일 없이 選數(선수)만 쌓으면서 선거 때만 되면 태도와 표정이 달라지는 현역의원들을 보면 '공천혁신'이 아니라 '공천학살'이 절실하다고 느낄 때가 많다.

공천에서 못 거르면 유권자들이 퇴출시켜야 한다. 세대교체, 인물교체는 선거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반복돼온 자연스런 일이다. 세월이 전해주는 이런 메시지를 읽지 못하고 자리에 연연하는 정치인의 末路(말로)가 아름다울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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