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변광섭 청주시문화재단 총괄코디네이터

봄이 오는 길목에서 들이나 숲길을 걸을 때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시가 있다.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저항시인 이상화가 나라 잃은 슬픔을 피를 토하듯 절규한 시가 아니던가. 각다분한 도시의 일상을 접고 삶의 향기를 찾아 떠나는 여행길에 아픔이 서려있는 시를 읊는다는 것이 가당찮지만 문득문득 내 가슴을 요동치게 한다.

초정고개 너머 증평 율리의 들길과 호수를 따라 오르면 드높은 좌구산이 나그네를 반긴다. 이미 책벌레 김득신의 테마마을과 휴양림과 천문대 등의 관광자원으로도 인기절정인데 나는 좌구산 최정상을 오르면서 피를 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숲길에는 300여 년의 세월을 견뎌 온 소나무나 수 백 그루가 있는데 성한 것이 하나 없다. 몸통의 허리마다 칼자국이 선연하다. 일제 강점기에 강제노역을 통해 우리의 소나무를 약탈한 상처들이다.

놈들은 이토록 깊은 산속까지 와서 소나무의 송진을 빼내 연료 등으로 사용했다. 소나무는 그 큰 아픔과 상처를 품고 이 땅의 강산을 아무 말 없이 지키고 있다. 얼마나 시리고 아팠을까. 그렇지만 소나무는 울지 않는다. 울음도 사치라며 북풍한설 앞에서 온 몸으로 버텨내고 있다. 산다는 것은 견디는 것이라고, 아픔도 견디고 슬픔도 견디는 것이며 그 견딤이 쓰임을 만드는 것이라며 귓속말을 하는 것 같다. 그날의 만행을 잊지 않고 더욱 강한 생명의 가치로 일어서는 것이 진정한 승자의 길이라는 외침 말이다. 그 숲길은 상처로 가득하지만 맑고 향기로움이 끼쳐온다.

지난해 가을 영동 민주지산 자락에서 만난 폐동굴도 일제의 아픔이 서려 있었다. 근 100년 된 폐 금광이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 굴을 파고 주민들을 강제노역 시키면서까지 금을 캐가던 곳이다. 계곡을 넘어, 밀림같은 숲을 헤치고 들어가니 사람보다 높은 굴이 나타났다. 안으로 들어가니 끝이 보이지 않는다. 마을 주민과 함께 들어간 곳은 500m 정도였지만, 총 길이가 2㎞는 될 것이란다. 온 몸을 녹이는 서늘한 공기, 금맥을 따라 흐르는 차가운 물길, 반짝이는 금모래빛, 그리고 도룡뇽과 박쥐 등의 생명이 지난 세월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었다.

동굴 바로 옆에는 금을 캐서 옮기고 선별하는 등의 작업이 진행됐을 노역 현장이 남아있다. 좁고 긴 계단을 타고 내려가면 원형경기장 같은 모습의 폐공간이 나오고 여러 개의 문과 창고와 작업의 현장이 있다. 마을 주민들은 이곳으로 끌려왔을 것이고, 고된 노동을 강요받지 않았을까. 이처럼 아픔의 현장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가슴이 먹먹하고 혼미해졌다.

이처럼 우리지역 곳곳에는 일제 강점기 아픔으로 얼룩진 곳이 많다. 빼앗긴 땅과 민족정신을 되찾기 위해 온 몸으로 맞서 싸운 곳도 적지 않다.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는 또 얼마나 많던가. 단재 신채호 선생만 해도 그렇다. 단재는 1910년 칭다오를 시작으로 파란만장한 망명생활을 하며 안창호 등과 함께 칭다오회의에 참석한 뒤 상하이, 베이징 등으로 거처를 옮겨가며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힘썼다. 1936년 2월 21일, 뤼순형무소의 차디찬 감방에서 순국할 때까지 독립운동가로, 언론인으로, 민족사학자로 불꽃처럼 살아오지 않았던가.

아픔을 기억하고 기념하자. 아니, 이 모든 아픔을 스토리텔링으로 엮어 불꽃같은 민족정신으로, 새로운 미래의 창으로, 시민단결의 반석으로 삼자. 시를 쓰며 시대의 비극을 아파하던 윤동주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지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라며 불멸의 밤을 보내지 않았던가. 나도 다시 청년으로 돌아가야겠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고심참담의 시간을 가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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