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민정 수필가

진갑(進甲)을 넘긴 큰 오라버니는 요즈음 그야말로 조르바처럼 살길 원하는 사람 같다. 직장 생활로 옥죄이던 많은 끈들을 죄다 풀어 놓은 듯 달뜬 마음으로 심신이 바쁘다. 퇴직 후 잠시의 휴식도 없이 부모님 살아생전 일구어 놓은 전답 위에 임대사업을 계획하면서 서울에서 고향까지 수시 왕래하며, 부동산사무실로 측량에 토목공사까지 마음은 벌써 건축 준공이 다 된 듯싶다. 시내 변두리에 자리한 8차선 도로변에는 한 섬지기 논배미가 있다. 다른 땅 보다 아버지의 애착이 더 한 땅이었다. 일찍이 맏아들 몫으로 당연한 것이었다. 아버지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대부분 재산을 물려받은 오라버니는 다행히 지금껏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요즈음 그 중 일부를 팔았다는 소식을 뒤 늦게 알았지만, 부모님의 피땀 어린 땅이 팔렸다는 사실을 안타까워 할 뿐 칠남매 중 누구도 감 놔라 배 놔라 말이 없다. 부모님이 작고하신 뒤 한때는 재산 때문에 모두가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마냥 긴장되어 있었고 함께 하는 자리는 편치가 않았던 시간도 있었다.

며칠 전 공장 설계도면을 들고 사무실로 찾아왔다. 기대에 찬 모습으로 한 동(棟)은 당신 명으로, 다른 한 동(棟)은 당신의 아들 명으로 신축을 해야겠다며 그래도 동생이 근무하는 건설회사에서 시공을 부탁 한다고 했다. 다음 날 공사현장도 파악 할 겸 도면에 그려진 고향의 한 섬지기 논둑에 섰다. 벌써, 주변에는 많은 공장건물들이 차곡차곡 들어차기 시작했다. 어느새 토목공사로 논둑 경계가 사라진 드넓은 논배미 뒤로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봄이면 아버지는 이 논에 모내기를 하기 위해 무논에 물을 대고 소를 부리며 써레질을 하느라 바쁘셨다. "이랴, 쪄쪄' 따가운 봄볕아래 소를 부리는 소리가 마을 맨 꼭대기에 위치한 우리 집까지 들려왔다. '쇤일'을 하시는 아버지 새참을 위해 아홉 살 나는 어머니가 싸주신 막걸리와 빈대떡을 들고 논으로 자주 나갔다. 논둑길을 가다 보면 물뱀이 느닷없이 스르륵 내 앞을 지나간다. 너무 놀란 나머지 비명을 지르며 논두렁에 쭈욱 미끄러져 주저앉아 있노라면 아버지는 저쪽 윗배미에서도 용케 내 소리를 듣고 휘휘 달려와 주시곤 했다. 거의 쏟다버리고 남은 막걸리로 겨우 목을 축인 아버지는 내게 기다란 막대기를 만들어 주셨다. 돌아가는 논둑길을 긴 막대기로 논두렁을 휘휘 내저으며 돌아가다 보면 물뱀은 저만치 도망갔다.

말씀이 적고 우직했던 아버지. 특별히 자상하게 잘해 주신 기억은 없지만 늘 든든했던 아버지였다. 막걸리의 힘으로 농사를 지으신다던 막걸리를 거의 반 이상 쏟아버리는 딸에게 묵묵히 긴 막대기를 만들어 휘휘 젓는 시범으로 딸의 두려움을 쫓아 주셨던 아버지는 오랜 세월 내 삶의 두려움도 이겨내게 하셨다.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는 고향은 아버지의 노고와 헌신으로 일궈 놓은 시간을 그대로 지키고 싶었지만 문명은 또 다른 모습으로 변화되고 있었다. 이제, 한 섬지기가 아닌 반 섬지기가 되어버린 땅이지만 오라버니의 남은 삶이 이곳에서 열매 맺기를 바랄뿐이다. 공장 신축공사의 첫 삽을 뜨는 날이다. 돼지머리에 막걸리, 상량식에 절을 하는 오라버니의 등에서 아버지 모습이 선연하다. 강한 아버지의 모습이다. 비록 유년시절의 추억을 다시는 볼 수 없지만 언제라도 찾아갈 수 있도록 고향을 지키는 오라버니가 있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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