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준 칼럼] 논설실장·대기자

총선정국의 쟁점으로 등장했던 야권 단일화가 사실상 물 건 너 갔다. 정책, 비전, 새인물이 없는 3無(무) 총선이라고 불리는 이번 선거에서 가장 주목받은 것은 야권단일화 여부였다. 단일화는 힘이 세다.

단일화는 현대정치사의 고비 때마다 권력구도의 물줄기를 돌렸다. 정계를 주름잡았던 거물 정치인들은 대부분 단일화로 정치적인 승부수를 띄웠다.

소위 양김이라고 불리는 김영삼과 김대중은 단일화에 실패했어도 대통령이 됐고 노무현은 단일화에 성공해 대통령이 됐다. 문재인은 안철수와 단일화를 성사시켰지만 분루(憤淚)를 삼켰다.

양김은 1987년 대선을 앞두고 국정종식을 위해 후보단일화에 나섰다. 하지만 양측은 줄다리기 끝에 김대중이 분당선언을 하면서 단일화는 깨졌다. 그해 대통령은 군부내 하나회 출신인 노태우가 됐다.

김대중은 1992년 대선에서 라이벌 김영삼에게 패배해 소수파의 한계를 뼈저리게 절감한다. 이후 김대중은 97년 대선에서 충청권 맹주였던 자민련 김종필에게 국무총리와 경제부처 조각권을 제시하고 손을 잡았다. 여기에 박태준까지, 반 이회창 세력을 결집한 소위 '디제이티(DJT) 연합'이었다. 이렇게 형성된 단일화로 김대중은 이회창을 꺾고 집권에 성공했다.

2002년 대선에서도 야권단일화는 필승전략이었다. 민주당 후보로 나선 노무현은 지지율 하락을 단일화로 돌파했다. 상대는 2002 월드컵 붐을 타고 대선후보로 급부상한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였다. 단일화는 여론조사로 판가름 냈다. 노무현은 결국 정몽준을 누르고 단일후보로 선출되며 대세론을 외쳤던 이회창을 꺾었다.

야권 단일화의 파괴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대선뿐만 아니라 총선에서도 단일화는 제의하는 측이 명분과 실리를 챙겼다. 진보성향의 시민사회단체도 야권단일화를 압박한다. 단일화를 회피하면 야권분열을 획책하는 무책임한 정치인으로 매도한다. 아예 연대를 거부하면 역사의 죄인 취급을 당한다.

안철수 국민의당 공동대표 / 뉴시스

이번 총선에서도 야권단일화가 선거 판도를 흔들 수 있는 큰 변수였다. 하지만 더민주·진보세력과 국민의 시각은 다른 듯하다. 양김 시대의 단일화는 군부정치를 더 이상 좌시해서는 안된다는 국민적인 공감대를 형성했다. 야권이 힘을 모아 정치민주화를 앞당겨야 한다는 것을 대다수 국민들이 원했다. 김대중의 DJT연합과 노무현·정몽준의 여론조사 담판도 진보세력이 정권을 창출하기 위한 고도의 통합전략이었다.

하지만 이번 총선에서 단일화를 주장하는 것은 야권통합이 아니라 야권 야합이 될 수 있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우여곡절끝에 한지방 아래로 뭉친 야권이 총선을 앞두고 분열된 배경에 국민들은 공감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 상승하고 있는 국민의당 지지율이 말해준다.

야권단일화의 진정성도 의심받는다. 김종인 대표는 단일화를 채근했지만 문재인 전대표는 "국민의당 후보중 수도권에서 당선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 아니냐"며 조롱했다. 일여다야(一與多野) 구도가 불리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야권분열을 부추긴 정치인은 선거에 책임을 지는 것이 옳다.

야권단일화가 필요할 지라도 지금같은 정당구도로는 안된다. 영호남의 주요 격전지에서 새누리당과 더민주당이 고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양당체제에 대해 환멸을 느끼거나 식상했기 때문이다. 공천과정에서 보인 양당의 행태에 대해 실망을 넘어 절망을 느꼈다는 국민들이 많다. 일부 전문가중에는 이번 총선이 역대 선거중 투표율이 가장 낮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실제로 리얼미터는 최근 중년층에서 적극투표층이 하락하고 있다는 조사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여야 양당체제가 국민들의 눈높이를 맞추지 못한다면 신당이 나와서 새바람을 일으키는 것도 바람직한 구도다. 당연히 보수층은 새누리당으로 결집되고 진보층은 더민주당에 쏠릴것이라는 오만과 독선 때문에 公薦(공천)이 기준도 원칙도 없는 私薦(사천)이 되고 옥새 파동, 존영 논란, 셀프공천, 무소속 공천, 비박연대등이 이번 총선을 규정짓는 신조어가 됐다.

국민들에게 선택의 폭을 넓혀주고 기존 정당을 각성시킬 수 있다면 국민의당과 비박무소속연대등 제3세력의 출현은 양당에 정신을 번쩍 들게하는 '죽비(竹扉)'가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야권연대에 쇄기를 박은 안철수의 완주(完走)도 눈여겨봐야할 대목이다. 더 이상 '철수(撤收)정치'는 보기 힘들 것이다. 총선이 끝나면 바로 대선정국이다.

아무래도 이번 총선은 다음 대선의 예고편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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