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민정 수필가

해마다 학생이 줄어드는 고향의 초등학교 존폐여부를 두고 동문회에서 임시총회가 있다는 연락이 왔다. 뜻하지 않은 소식에 만감이 교차했다. 천변만화하는 도시의 변화 속에서 나무처럼 물결처럼 천천히 살고 싶을 때마다 그리워하던 모교였다. 교정을 떠올리면 답답하던 시름도 잔잔한 서정으로 덜어 주었고, 주물처럼 무뎌져있는 감성도 일깨워 주었다.

혼잡한 세상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는 모교는 한때 7~8백 명의 학생들로 활기차던 운동장이 지금은 전교생이 60여명도 안 되는 분교에 지나지 않았다. 모교를 생각하면 아직도 내안에는 꺼지지 않는 따뜻한 등불이 하나가 있다.

문득, 그녀의 말간 얼굴이 더욱 그리워지는 순간이다.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반짝이는 등불은 "숙희"였다. 늘 심안을 밝히는 그 빛은 그리움의 실체이기도 했다. 영롱한 두 눈빛, 하얀 피부, 단정한 옷차림. 반질반질한 검은 머릿결, 침착한 말투에다 성적은 1등을 놓치지 않았다. 모든 선생님들의 총애를 듬뿍 받으며 6년 동안 반장을 도맡았다.

5학년 겨울방학 이었나 보다. 20여분은 족히 걸어서 그녀가 사는 동네로 놀러 갔다. 밤이 이슥해지자 친구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혼자 남게 되었다. 거리는 점점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들고 혹한의 찬바람은 온몸에 스며들었다. 집으로 가려면 산길을 따라 오솔길로 접어드는 곳에 상여 집을 지나야만 했다. 오금이 저려 소리도 못 내고 떨고 있을 때 어찌 알았는지 "무서워하지 마, 내가 데려다 줄께!" 숙희는 자기오빠를 데리고 와서 나의 손을 잡았다. 그때 그녀의 따스한 한마디가 잊혀지지 않는다.

그 후 그녀는 사학을 전공해 중학교 역사 선생님이 되었다. 그녀가 가끔 고향에 내려 올 때면 옛 추억을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녀의 모습은 노을처럼 모든 잡색을 품어 안았지만 어지럽지 않았고 고요했다. 그녀의 부러움을 닮고자하는 친구들도 많았지만 운명의 여신은 그녀에게만 손을 뻗었다. 결혼 역시 명문대 출신의 장교와 결혼했다.

영리하고 잘 생긴 두 아들을 낳았고 교편생활로 운명의 여신은 그녀의 후광을 더욱 밝게 비추었다. "얼굴 예쁜 건 40일이면 배부르고, 성격 예쁜 건 40년이 지나도 배고프다"는 말도 있지만 그녀에게만은 예외였다. 결혼 후 그녀와의 만남은 거의 없었다. 간간히 통화로 안부를 알 수 있었다. 마지막 통화 속에서 그녀는 시어머니와의 갈등으로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천청벼락같은 비보가 날아왔다. "숙희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데...." 숙희가 죽었다고 생각하기엔 그녀는 겨우 40대 초반이었다. 거짓 같은 그녀의 소천으로 말미암아 며칠을 충격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렇게 믿었던 행운의 여신은 무엇을 한 것일까? 꽃이 아름다운 만큼 슬프고, 향기는 취할수록 허기를 주는 것처럼 허한 마음은 무엇으로 채울 수 없었다. 그녀처럼 한순간의 빛남으로 끝날 짧은 생이라면 이토록 치열하게 살 이유가 없을 것 같았다.

시간은 흘러서도 서툰 세상 뒤돌아 볼 때 마다 그녀는 등 뒤 서 있었다. 보이지 않은 것과 보지 못하는 것의 간극은 의지로만 메울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녀를 보내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비운다는 의미를, 익숙했던 것에서 벗어날 줄 아는 법을 알았다. 임시총회에서는 학교를 특성화 시켜서라도 유지해야 한다며 후배들은 열변을 토해 내지만 별다른 대책이 없던 회의는 애교심만이 회의장을 달구었다. 살며시 회의장을 빠져나와 학교를 둘러보았다. 그녀의 선명한 목소리가 운동장에 자박하게 깔려있다. 교무실에서 교실로, 조회대에서 교문까지 그녀의 향기도 내내 따라 다녔다. 돌아오는 길, 그녀가 동행해 주었던 밤하늘에는 푸른 기억이 끝 간 데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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